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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동네 시인선 185 박윤근 시집, 『그러나 너무 늦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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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34회 작성일 23-01-27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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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동네 시인선 185 박윤근 시집그러나 너무 늦지 않게


상상의 자유생산의 시학

박윤근 시집그러나 너무 늦지 않게(시인동네,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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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소개


2015년 문예바다로 등단한 박윤근 시인의 첫 시집 그러나 너무 늦지 않게가 시인동네 시인선 185로 출간되었다박윤근 시인이 펼쳐놓은 이 시집을 읽어보면 상상력의 천국이고 자유의 유토피아임을 알 수 있다박윤근 시인은 초현실주의자가 아니라 초현실적 상상력의 소유자이다그의 기발한 상상력이 그려내는 화려한 그림을 보려면독자들도 새와 별이 되어 대척적인 공간들을 마음대로 왕래할 수 있어야 한다.



■ 시인의 말


나의 이번 첫 시집에 달빛과 장미향에 길든 장미’,

두 어벤져스가 등장한다.


달빛 족속은 그 달빛이 아직도 고랑을 번져가며 짙어갈 것이고

장미의 족속들도 1킬로그램의 오일을 얻기 위해

숲과 거리를 헤매고 있을 것이다.


한번 장미향에 길든 이는

이미 장미의 족속,


나는 이들 두 부족과 함께

끊임없이 나의 세계를 확장해 나갈 것이다.


우리는 모두 넝쿨처럼 번진

꽃의 무리를 보고야 말았다.


2022년 10

박윤근




■ 책 속에서


책을 읽다가

문장 하나를 발견했다

사막 한가운데 볼록한 낙타 등처럼 묻혀 있다

허기를 막 채우고 왔는지

포만 가득한 미동이 꼬리 끝까지 물려 있다

손이 자주 닿아 무뎌진 책갈피 끝은

새들이 이동하던 통로,

먹이를 찾아 떠난 짐승들의 야성의 냄새가 아직 짙다

날개와 뼈대가 접혀 매몰된 대목의

암각을 해독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쥐라기 지각변동에 모두 매몰돼 버렸다는 중략 구에서도

뒷발 화살 모양의 활자는

여전히 앞 문장의 목덜미를 겨누고 있다

밑줄 친 글 속 수런거림에

검은 발자국들이 콩알처럼 흩어지며

행갈이를 이어간다


하늘에서 저 날개들 겹치지 않는 것은

먼저 날아간 새들의 근황을 풀어 읽는 까닭이다

새벽녘까지 까맣게 긋고 날아간 새들의 항적들이

차곡차곡 쌓여 별책 새 목차로 추가된다


얇던 책장이 차츰 두꺼운 밀림지대가 된다

―「시조새」 전문



온돌방에 자던 얼굴에 붉은 새 발 문양이 찍혔다

인간의 육신이 수면에 들 때는

시위를 놓친 과녁과도 같아서

활을 떠난 새는 화족(火鏃)처럼 달아

내 몸속 저편을 향했을 것이다

새벽녘 발톱이 공기를 가르며 착지하던 순간은

죽비를 내리치는 라마의 습성을 닮았었다

습성은 언제나 불완전한 것이어서

내 몸에 떠나보내야 할 것을 정확히 구분해냈다

파문이 오래도록 출렁였다

새는 맹독을 입에 문 듯 초연히 한 문장만을 안고

만 리 이녁을 날아왔을 것이다

세상에 대한 나의 신열은 그다지 미덥지 않았으므로

이 문장을 수신할 이는 나였음이 확실하다

필지(筆紙)에 촘촘히 적어 정성을 다한 발자국엔

온기 한 점만이 아니다

화인(火印찍힌 정신이 말갛다

―「새 발의 문장」 전문



우물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한 여자를 바라보고 있네


얼굴은 우물 속 무언가를 들여다보며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네


앞산은 잘려 있고 눈발도 끊겨 있네

쌓인 눈 속에 찍힌 발자국이 우물까지 닿아 있네


그녀의 발자국이 없었다면

나는 영원히 그녀 곁을 지나지 않았을 거네


나는 한 여자의 얼굴을 우물 속에서 바라보고 있네

우리는 기억의 샘에서 만나고 있네

―「사진」 전문



폭풍은 어디로 가는 걸까


나는 지난여름 싱크대에 놓인 수저 안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는 해수를

깨진 안경 사이로 바라다보고 있다

은빛 귓바퀴에 싸인 파도가

해안 쪽빛 모래시계 톱에 걸려 있다


아직 안경 속 바다의 경계는 불분명하다

해안선 바위에 부딪쳐 튀는 물보라가 방파제

벽면에 물고기 그림을 그리고 있다

경계가 없으므로

나는 잠시 안경 안에서는 지평선을 내린

섬이나 어족이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경계가 없으므로

공중에서 군함새 무리가 수직으로 하강하며

서로의 눈이 찔린다


찔린 눈 속으로 고기 떼가 몰려가며

해안의 한쪽이 시계 방향으로 쏠려 든다

해수가 빠져나가며

울컥 싱크대 수도꼭지 물이 쏟아진다

식탁 안경알에 한 획 더 빗금이 진다


나는 지금도

떠난 파도를 기다리는 흠집 난 안경이다

―「흠집 난 안경」 전문



처음 그가 이 들판에 나타났을 때는 입을 꽉 다문 작은 이슬 한 방울에 불과했다 손에 단단한 돌멩이를 쥐고 어디로 향해 날려 보낼 것처럼 보였지만 언제나 조그만 손이 헛헛해 보였다 무언가 채워야 하는 조바심이었던지 물 젖은 손으로 켜는 라이터 소리조차 공포스레 느껴졌다 그런 한순간 무슨 결심이 꽉 다문 입술의 갈래를 타고 깨지며 방울과 방울들을 간섭하기 시작했다 확장되기 시작했다 눈망울은 달콤했지만 어둠에 서서히 드러나는 들소의 윤곽처럼 위험했다 그러나 밀어낼수록 소문과 소문이 겹치며 차츰 들판의 풍경이 되어가는 거였다


어디로 향해 날릴 듯


날카로운 연필 끝에 뛰어내린

물방울이 지은 혐의들이 차츰 퍼즐처럼 맞춰지고 있는 거였다


캔버스 물방울들이 소리 없이 매달려 있다

―「물방울 퍼즐」 전문



돌아오지 않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온통 푸른 눈빛의 그가 사라진 뒤 한 움큼 빠진 밤의 자리에 잠시 불면의 밤이 생겼을 뿐


가난이 가난으로 가까워질 수 있는 건 더는 움막도 될 수 없는 빈방의 불 꺼진 구들 창을 열어보는 것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


이탈했던 둥근 시간이 새 방에 들었다 차디찬 구들에 동그란 눈빛이 온기로 차오른다 또 뜨거워진 어둠이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얼마나 다행인가 어둠으로 남는다는 것은 새 방을 얻은 연탄불이 따뜻한 이불 한 채 펴는 것은

―「어둠 한 채」 전문




■ 시인의 산문


정상을 가기 위해서는 희망이든 우울이던 바둑알처럼 어느 한쪽으로 쏠려 있는 건 위험하다고 생각했다언제나 불안한 온도와 습도가 손끝에 잡혔다.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 액셀을 밟았다마음이 먼저 보낸 풍경은 이미 마을 곳곳에 끼워져 있다오래전 집에서 내려간 거위들은 나를 알아보고 다가오기 시작했다양에서 음으로 천칭 축이 기울며 그곳 공기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내가 본 정상은 내가 사는 도로 위에서 상당히 가까운 곳에 있었다.



■ 작가 소개


박윤근 시인


전북 부안에서 태어났다. 2015년 문예바다》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12회 수주문학상〉 우수상14회 시흥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뉴스1에 이어 현재 아시아투데이》 호남본부 부국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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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프랑스 초현실주의의 리더였던 앙드레 브르통(A. Breton)에게 아나톨 프랑스(A. France)와 같은 사실주의자는 비난과 손가락질의 대상이었다브르통은 초현실주의 선언(1924)에서 사실주의를 순순하고 단순한 보고 문체의 문학이라 적시하고, “일체의 지성적정신적 비약에 자못 적대적인” “개떼의 삶이라고 야유하였다초현실주의자들이 볼 때가장 한심한 예술은 현실의 외양을 있는 그대로 베끼는 재현의 예술이었다그들이 볼 때 예술은 (현실의복제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의 창조 혹은 생산이어야 했다브르통이 볼 때 예술은 정신의 가장 위대한 자유를 실현하는 것이지 현실의 실증적 재현이나 메시지의 노예가 아니었다그는 자유라는 낱말 하나가 아직도 나를 열광시키는 모든 것이라 고백했으며, “오직 상상력만 있으면 나는 있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고 말하였다.


박윤근의 첫 시집 그러나 너무 늦지 않게는 이런 점에서 상상력의 천국이고 자유의 유토피아이다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순순하고 단순한” 현실의 재현을 거부하고현실을 전혀 다른 언어로 재가공하는 것이다그는 분방한 상상력으로 범용한 세계를 파괴하고 그 폐허 위에 상상력의 새로운 집을 짓는다사물의 실증적 재현에 익숙한 자들에게 그의 시는 잘 읽히지 않는다그의 시를 이해하려면 상상력의 물꼬를 자유롭게 열어놓아야 한다사랑하는 사람을 안고 고향 하늘을 훨훨 날아가는 샤갈(M. Chagall)의 그림을 실증적 시선으로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당나귀와 물고기가 하늘을 날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풍경을 만드는 것도 상상력이고 그것을 이해하는 것도 상상력이다이 시집은 자유로운 연상으로 일상의 인과성을 파괴한다시인의 언어적 붓칠이 시작될 때낡은 관습의 세계가 무너진다그러나 상상력이 있다면 독자는 그 굉음 속에서 부활하는 새의 날갯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불에 타는 죽은 나무 위로 붉은 화염의 새가 날 듯박윤근의 언어는 낡은 재현의 죽음 위에서 날리는 꽃이다.


종이는 모두 둥근 각의 성채를 입고 있다

날카롭지만

달콤한 수액을 가진 파인애플처럼,


가령책상 위 저 종이를

가로와 세로 반 대각선으로 수만 번 곱접으면

붉게 물든 저녁노을이나 물방울을 볼 수 있다

동화를 들려주는 별들과

풀잎 끝 풍경을 모을 수도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접는 이의 의도에 따라

달리 접히거나 생략되는 순간

멍든 사과처럼 흠집이 생기거나 구겨진 채 버려진다


어둠 속긴 포물선을 그리며

지구를 스쳐 지나는 저 유성도

실은 우주의 뭇별들과 각을 이루기 위해

지상 끝 저 모서리로 내리는 것이다


저녁별이 가득 앉은 과수원,

또 펀펀하게 무슨 축제가 열리고 있는지

입 안 가득 침이 고인다

문장의 한쪽 각이 또 불안하다


막 계곡 틈 사이로

사과 한 알 떨어지는 참이다


― 「」 전문


시인은 (원할 때면아무 때나 평면을 구체(球體)로 만든다. “둥근 각이라는 형용모순은 상상력의 왕자에게는 거짓이 아니다평면의 종이는 둥근 파인애플이 될 수도 있고잘 곱접으면” “붉게 물든 저녁노을이나 물방울”, 혹은 별을 바라보는 풀잎의 풍경이 될 수도 있다상상력의 궤도에 따라 종이는 멍든 사과를 만들기도 한다이렇게 종이를 자유자재로 가공하는 상상력이 한바탕 지나간 자리에 과수원이 생기고 거기에 저녁별이 내려앉는다시인의 공감각이 성급한 단맛을 느낄 때, “입 안 가득 침이 고인다”. 이 시는 그의 상상력이 어떻게 세계를 재가공하는지그 독특한 과정을 잘 보여준다글이 써지고 문장이 이어지는 동안 시인은 메시지의 전달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상상력에 자신을 온전히 맡긴다종이가 접히면서 주름을 만들듯이 문장들이 마주쳐 둥근 각을 이룬다모든 만남은 각을 이루기 위해” 존재한다각과 각이 만나서 하나의 세계즉 둥근 각이 이루어진다각들의 만남은 각의 날카로움을 어르고 달랜다각이 둥글어지는 것은다른 각을 만날 때이다. “문장의 한쪽 각이 불안할 때그 각은 다른 각이 필요하며다른 각을 만나 둥글어질 때 그 각의 불안은 사라진다그러므로 시 쓰기란 평면을 접어 구체를 만들 듯불안한 상상의 각들을 만나게 해서 둥근 각을 만드는 것이다.


― 오민석(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

[출처시인동네 시인선 185, 박윤근 시집그러나 너무 늦지 않게|작성자 시인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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