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언제나 언니]는 박홍점 시인의 세 번째 신작 시집으로, 「안녕이라고 말하면 꽃이 필까?」, 「언제나 언니」, 「눈을 붙일 수 없어 벌판」 등 60편의 시가 실려 있다. 박홍점 시인은 전라남도 보성에서 태어났으며,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1년 [문학사상]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차가운 식사] [피스타치오의 표정] [언제나 언니]를 썼다.
“평범하고 보편적인 것들에 대한 박홍점 시인의 관심은 곧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사실들을 끌어들이는 힘이기도 하다. 모순적으로도 여겨지는 그의 이 같은 특징의 중심에는 [언제나 언니]를 읽은 독자들이라면 쉽게 동의할 수 있는 것처럼 가족 서사가 자리하고 있다. 그것은 먼저 ‘가족’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의미와 연관되어 있다. 가족은 사회를 유지하는 근간으로 사회체제와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영역이다. 따라서 우리 개인은 누구나 가족이라는 제도를 통해 사회와 만나게 된다. 반면에 가족 구성원의 관계는 언제나 가장 사적인 차원에서 시작되고 유지되는데, 바로 이와 같은 모순적 상황이 ‘가족’ 안에 내재되어 있는 셈이다.
그렇게 가족의 구성원으로 “거품을 만들고 거품을 지우는 날들의 반복”처럼 살아가면서 시인은 결국 세상 모든 것들의 근원으로서 ‘엄마’를 발견하기도 하고, “날지 못한 거품들”의 삶을 보다 선명하게 만들기도 한다(「거품들」). 「안녕이라고 말하면 꽃이 필까?」를 비롯해서 「일요일」이나 「커피공장이 있던 동네」 등에서 사라져 버린 것들이 남긴 흔적에 집중하고 있는 것을 시집의 처음부터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는 것도 같은 차원에서 이해해 볼 수 있다. 가령 「눈사람」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시인의 시선은 지금의 ‘눈사람’이 놓여 있는 곳에서 “호랑가시나무가 있던 자리”나 “수국이 피던 자리”를 복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홍점 시인이 복원하는 삶의 모습이 자본주의적 기준의 선택과 다르다고 했을 때, 그것이 마냥 행복할 것이라는 기대와는 관련이 없다. 그가 보여 주는 모습들을 따라 우리 역시 때로는 추억의 방식으로 지난 삶의 모습들을 떠올려 볼 수도 있겠지만, 그가 바라보는 것은 언제나 슬픔이나 고통과 함께 지속되는 인간 삶의 모순적 상황 그 자체이다. 이와 같은 삶의 모순들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유일한 유산이다.” (이상 남승원 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목차
시인의 말
제1부
눈사람 - 11
안녕이라고 말하면 꽃이 필까? - 12
일요일 - 14
커피공장이 있던 동네 - 16
언제나 언니 - 18
창문은 권태를 모른다 - 20
제대로 된 혁명을 읽는 동안 - 22
주먹장미가 필 때 소년은 온다 - 24
SPICY SEAFOOD PHO - 26
운동화는 유쾌하다 - 28
세 자매 - 29
흰 손바닥들이 하염없이 내렸다 - 30
센베이 속 생강은 술수다 알면서도 생강센베이를 먹는다 - 32
푸른차산성으로 가는 길 - 34
제2부
안식일 - 39
장미의 연대 - 40
우리는 늘 이별이다 - 42
복수초의 격려 - 44
공지 사항 - 46
일요일의 병 - 48
폴라로이드 - 50
십이월 - 52
클레멘타인 - 54
몸이 가장 가벼울 때 - 56
하품을 받는 오후 - 58
보리수 열매가 호명하는 풍경들 - 60
밤골 - 62
엄마의 탄생 - 64
영랑호에서 - 66
벽 - 67
제3부
석류 - 71
눈을 붙일 수 없어 벌판 - 72
자작나무는 늘 혼자 있는 기분이다 - 74
2.5센티미터 허공을 확보했다 - 76
스틸 라이프 - 78
내일의 노래 - 80
경화 - 82
나팔꽃의 개화 - 84
안부 - 85
거품들 - 86
밤의 산책 - 88
방 - 90
여름의 파편 - 91
밤의 공중전화 - 92
제4부
늦게 온 사춘기 - 95
눈에서는 뭉근한 슬픔의 냄새가 난다 - 96
타임 리프 - 98
물의 감정들 - 100
사선의 풍경들 - 102
통 속에 누워 - 104
논의 중일 때 - 106
지금도 누군가는 라디오를 듣는다 - 108
천공기 - 110
열린 결말 - 112
아이들은 태어나려다 돌아갔다 - 114
양귀비꽃밭을 찾아가는 중입니다 - 116
구근들 - 117
봄날의 이별 - 118
풍향동에 두고 온 책상 - 120
그날의 공기는 식탁 위에 떨어지는 단풍잎 - 122
해설 남승원 모순으로 만들어진 삶의 평범함 - 124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책 속으로
〈안녕이라고 말하면 꽃이 필까?〉
비탈의 탱자나무는 몇 년째 꽃 피우지 않는다
무슨 빛나는 말을 하려고
너를 떠올리면 유년의 운동장
작고 흰 꽃의 보디가드
또 다른 의미에서 공간의 파수꾼
그러나 가시는 장식이 되어 버린 지 오래
꽃을 피우는 나무의 여행을 멈춘 지 오래
나무가 꽃을 피우는 까닭은 깊은 무료함을 위한 투쟁
그런 의미에서 비탈의 탱자나무는 반칙이다
노란 금구슬의 시간은 오래전 소문
가시는 고요 속의 혼잣말 같은 비명
비명은 뿌리에 닿지 못하고
초록 이파리들 사이에서 겸연쩍다
무슨 일로 몇 년째 침묵이야
지나가던 붉은 입술이 질책하는 소리를 듣는다
너는 더벅머리를 긁적이며 시월의 언덕을 본다
볼 때마다 안녕, 안녕…… 붉은 입술로 안녕! ■
〈언제나 언니〉
그는 언제나 집안의 홍 반장
동생이 여섯
베틀에 앉아 뚝딱뚝딱 베를 짜고
동생들 머리를 감겨 주고 묶어 주고
아모레 화장품 가방을 들고 골골이 찾아다닐 때
그의 어깨는 오른쪽으로 기울고
오만 원짜리 지폐를 택시 창밖으로 내던지고
어린 조카 미미의 집 커튼을 달고
사계절이 있듯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네 번의 쉼표와 네 번의 마침표
그는 과연 누굴 사랑했을까
미끈한 다리로 미니스커트를 입고
용두산 엘레지를 익숙하게 부르고
그는 언제나 집안의 홍 반장
사랑하는 조카가 열여섯
이제는 돌아와 6인실 요양병원 침상에 누웠다
집안의 역사였던 그가 창밖 단풍나무 쪽으로 돌아눕는다
가을비는 연거푸 한낮의 길을 지우고
앞차의 전조등을 지운다 ■
〈눈을 붙일 수 없어 벌판〉
탱자나무 울타리를 지날 때 슬그머니 날개가 돋아난다 안녕이라는 말도 없이 떠나온 벌판 일종의 금단증세 출입구 비밀번호는 표정을 바꾸지 않고 손 내민다
텅 빈 휴일 물티슈를 뽑아 남아 있는 출렁임과 마우스의 지문을 닦는다 괜스레 열어 보는 냉장고 환하다 쉬지 않고 환하다 삼 년 만에 한 번씩 실시되는 정기 점검 그때 겨우 몇 시간 눈을 붙였을까?
까만 화병 속에서 흰 실뿌리들 밀어내며 키를 키운다 금전수라는 이름은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명명이다 물 몇 방울이 책상 위에 떨어진다 떨어진 물방울이 한 번 더 투명을 닦는다
책상 아래 슬리퍼는 깜깜하다 폭포처럼 빠르고 거세었던 날들 한 번도 퇴근하지 못했던 어리석은 열정들, 어림잡아 이천이백스무 날 감정을 돌보고 표정을 살피느라 잠 못 들었던 페이지들 가파른 밤들
숲으로 가는 길 마사토 위에 혹은 팔 차선 횡단보도 앞에서 늦은 사직서를 쓴다 지금은 창밖 무성했던 플라타너스 이파리들이 둥글어지며 습기를 날리는 중 영근 씨앗들은 도움닫기를 한다 몸에게 미농지처럼 얇았던 감정에게 맹세 같은 것을 한다 ■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