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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호 시인 네 번째 시집 『가령 무제의 입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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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26회 작성일 23-10-16 16:09

본문

서평】 오래전 놓아두고 온 것에 대하여

/도서출판 상상인 시선 041(23/10/16)/규격 128*205 | 126| ISBN 979-11-93093-18-4(0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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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언어가 닿지 않는

낯선 시간 속의 그 은밀한 이야기


종심從心을 훔친 나는 여전히

텅 비어 있다


송병호 시인 네 번째 시집 가령 무제의 입장에서를 읽고


글/ 김부회 시인문학평론가



들어가며


송병호 시인의 시집 초안을 받고 한참을 망설이다 정독을 했다시인이 추구하는 시 세계라는 다소 거창한 이름으로 맥락을 분석하고 시적 알고리즘을 찾아내는 것이 서평의 본질이라는 생각으로 시를 읽다가 문득형태적이거나 관습적인 것이 아닌그 외의 것을 소유한 시인의 시적 미각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무제라는 말은 쉬우면서도 어려운 단어다마치 이름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와 같은 말제목을 붙일 수 없거나 제목이 필요하지 않거나 제목에 연연하지 않고 싶을 때 무제라는 단어를 쓰기도 한다몇 년에 걸쳐 송병호 시인이 발간한 시집들 환유의 법칙』『궁핍의 자유』『괄호는 다음을 예약한다의 세 권의 시집 속에서 시인이 말하고 주장하는 것은 인간의 본원에 대한 문제 제기와 근본 속성에 대한 것들이 주류를 이루었다때론 강렬하고 때론 인본적인 시인의 눈길이 멈춘 지점에서 시가 발아되고 사유와 사념의 저변을 꽃 피운 것이 핵심일 것이다시인이 목사라는 사회적 공인의 직업을 가진 것이 이유라면 이유일 수 있을 것이다하지만 직업이 모든 송병호 시인의 글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또한 시인이 살아온 삶의 궤적이 신앙을 바탕으로 정직과 절제라는 종교적 규범과 사회적 규범의 엄격한 잣대를 완벽하게 준수한 것도 아닐 것이다시인의 가슴에 담긴 시에 대한 열정은 시 종교라는 관점을 묘하게 에두르는 속성이 있다아닌 것 같은데 하면서도 결국 관점의 종국에 이르러 그럴 수 있다는 긍정을 하게 만드는 매력을 갖고 있는 것이 송병호 시인이 가진 가장 큰 시의 질감이라는 것을 이번 네 번째 시집 초안을 정독하며 느낀 소회다가령假令이라는 말은 일반적인 진술을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설명하고자 할 때 뒤따르는 문장을 이끄는 데 쓰이는 말이다그 가령이라는 말 뒤에 무제의 입장에서라는 다소 모호한 문장을 사용했다는 점이 독특하고 신선하게 다가왔다가령 다음에 오는 문장은 진술을 구체적으로 하기 위한 것인데 그 진술의 제목이 무제라는 것은 그만큼의 무게가 더 실려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환유의 법칙이나 궁핍의 자유에서 단절된 관계와 관계의 차이를 냉철하게 요약하고 현미경처럼 들여다보았다면 이번 시집에서 시인이 본 것은 이미 규정지어진 현상이 아닌현상이 규정지어지게 된 이유와 배경이른바 배후를 통찰하는 겹눈을 소유하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시는 현상에 대한 묘사와 더불어 현상에 대한 공감각 혹은 자유의지에서 발원하는 사고의 다양성을 어떻게 형상화하는 것에 따라 많은 질감을 얻거나 상실하게 된다네 번째 시집 가령 무제의 입장에서는 이전보다 더 완성형 관조에 가까운 깊고부드러운 시인의 눈을 느끼게 한다살아 있는 문장이란 이런 것이다죽은 문장은 현상에 집착하고 산 문장은 현상의 배후에 집착한다는 말처럼 송병호 시인이 추구하는 시의 진화 단계는 이미 농익은 계절처럼 모든 것을 포용한다마치 가을이 땡볕과 찬 서리 모두를 포용하며 익어가는 것처럼 시인의 감수성과 삶의 진솔하고 곡진한 방식이 그저 부러울 뿐이다시가 시에서 멈추지 않고 삶으로 파고들어 삶이 되고그것이 다시 오래전 놓아두고 온 것들에 대한 소회와 반추를 통한 성찰의 과정을 거치는 선순환의 연결고리가 보인다어쩌면 그것이 송병호 시인이 네 번째 시집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하려는 나눔이라는 목적을 염두에 둔 정신적 배려라는 생각이 든다시집 속 내용을 하나둘 읽다 보면 이 가을의 깊이에 딱 맞는 새로운 각성의 무게가 내게도 생길 것 같은 느낌이 든다오랜만에 제법 무게 있는 시집을 대한다화려한 언술이 아닌 따뜻한 감각의 제국과 같은 시의 성찬에 잠시 참여해 본다.


들여다보기


낙서로만 읽을 수 없는 낙서

오래전 그때에



1

기도를 들어주시되 이브)의 향기는 나중에 주세요 이슬을 먹고 사는 새벽기도도 그렇고 동을 밝히는 첨탑의 파수꾼도 그렇고 말씀이 소진되면 방향을 잃고 말겠지요 이름이 전도사인데 다윗의 시 한 수 읊지 못한 데서야 아닌 줄 알아요 은월처럼 정하게 하시고 검은 그루 빈터가 나와 무슨 상관일까요 숫눈의 눈결그거면 돼요


3

그나마 챙겨주셔서 더는 섭섭하지 않아요 몇 년 후는 오늘이 아닐 테니까요 울음을 웃음으로 지우라는 거그런 줄 믿어요 떨어지는 유성으로 낙차의 궤적을 좇아 엔터를 치고 몇으로 점을 찍어보지만 빛 고운 사과껍질의 수액은 능금이 아니겠지요


5

겨를이 이처럼 아까운지 몰랐어요

여간하겠지만 낙서로만 읽히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양생 중인 다향茶香을 입술에 우립니다


7

어디서바이올린의 높은음자리

Amazing grace


낙서로만 읽을 수 없는 낙서전문 인용


부제로 오래전 그때에는 을 달아두었다오래전 그때는 낙서로 생각한 것이 지금 되돌아보니 낙서가 아닌고해라는 생각을 한 것 같다마치 진심을 농담으로 적어 둔 오래전 메모나 일기처럼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명징하다오래전 그때 내가 말한 것의 진심을 당신을 알고 있는지아니 당신에게 가닿은 것인지아니면 아직도 가닿고 있는 것인지이 모든 미혹은 중요하지 않다시인이 말하는 것은 숫눈의 눈결그거면 된다는 말이다존재하고 인정하고 긍정하고 부정하는 모든 사유의 방식을 부인하고 사유에 대한 유물화를 선택한 것은 감수성의 발현이고 곡진한 자기 고백이며 고해성사와 같은 후련함이 공존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전도사라고 한들 다윗의 시 한 수 읊지 못한다 해도 그것이 무슨 부끄러움일까문제는 전도사의 마음에 들어선 신앙의 중심이 흔들리지 않고 바위처럼 굳건하면 만족한다는 말이다우리는 종종 형식이나 겉치레에 몰두하여 껍데기를 알맹이로 착각하는 경우가 다반사다관계와 관계에서 (어떤 종류가령 사람과 사람사람과 자연사람과 종교나와 너가족과 가족)비롯 될 수 있는 모든 착각과 오해의 근원이 껍데기를 보고 판단하는낙서를 낙서로만 읽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 있기에 송병호 시인은 말한다낙서를 낙서로만 읽을 수 없다는 반론을 제기하며 그때와 지금이 다른 것을아니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그것이 시의 질감이며 무게이며 시의 감수성이다삿된 미사여구와 화려한 언변의 잔치는 치우고 조용히 고백하듯 나의 오래된 낙서를 살펴보자나의 진실은 아직 내 가슴속에서 매미의 애벌레처럼 오랜 시간 날개를 펼 시간을 준비 중이다그랬기에 시인은 마지막 연에서 바이올린의 높은음자리로 Amazing grace를 들려준다위대한아주 위대한 은총은 하늘의 목소리라는 것을응답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위로라는 말



더러는 좋은 말이 상처가 될 때가 있다


병원에 다녀온 친구를 만나

위로랍시고 술 한잔하기로 한다


보이지 않는 이별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걸 알기에

섣불리 말 붙일 결이 없다


절반쯤 남은 잔을 채워준다


세월이라는 것이 시 한 수 지어놓고 그만 지워져 되살리기 키로 살려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시낭송 다시 한다고 풋풋한 맛을 내는 것도 아니고 인생사 다 모으면 여덟 글자라는데生老病死 吉凶禍福 속된 말로 한 사나흘 떡치다 보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탁탁 털고 일어서겠지


그저

한 잔 더 따라 준다


위로라는 말전문 인용


남의 괴로움이나 슬픔을 달래주려고 따뜻한 말이나 행동을 베푸는 것을 위로라고 한다위로의 사전적 정의를 써놓고 보니 위로가 안 된다좀 더 위로에 맞는 말을 생각해 보면 옆에 있어 주는 것말없이 들어주는 것따뜻한 눈으로 상처를 보듬어 주는 것술 한잔 부탁하면 따라 주는 것절반쯤 남은 잔을 채워주는 것본문의 결구처럼 /그저한 잔 더 따라 주는 것/이 위로의 본질이라는 생각이 든다위로는 내가 높은 자리에 있을 때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동등한 자리동등한 위치같은 결같은 간격에 놓여 있을 때 성립되는 것이다위로의 자리는 연단 위 높은 자리가 아닌무릎 꿇고 앉은 예배당 싸늘한 마룻바닥이다묻지도 않아야 한다질문은 더욱이 필요 없다?라는 말도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베풀거나 나눈다거나 하는 위치의 전이가 있어서도 안 된다. (그저)라는 말이 필요할 뿐이다달리 다른 행동이나 말을 하지 않은 채로 그냥그저 그냥일 때 위로는 위로가 된다생로병사 길흉화복에 무슨 이유가 필요할까다만 살아가면서 받아들여야 할 숙명이고 운명인 게지 하면 받아들여지는 것이 길흉화복이며 생로병사라는 생각이 든다태어나면서 손에 쥐고 나온 것이 없다고 하지만 결국 쥐고 태어난 것은 길흉화복 생로병사라는 여덟 글자라는 생각이 든다진정한 위로는 곁에 있는 것이다몸의 곁이 안 되면 마음의 곁에라도 같이 있어 주는 것이다있어 주는 도 틀린 말이다같이 있는 것이다무엇을 해 주는 것이 동질의 나를 너와 공존하게 느끼는 것을 위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시인의 경륜이 눈에 선하게 보인다때론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 가장 큰 진리가 됨을 배우게 된다.


서재를 베끼다



없는 것이 없다넉넉히 우주다

먼저 되고 나중 되고 나중 되고 먼저 된 것들


창조적 공격과 능동적 언어는 뭍의 바다를 통과하는 중이다 설령 없던 것이 태어나도 처음이라는 말은 쓰지 않는다 반복적이고 입체적인 내일이 오늘이듯이


보기에 좋았다


간혹 항로를 이탈한 별은 죽지만

수시로 비우고 채우는 우주의 뒷면은

같은 것이 다른 것으로 정돈된다


사악은 유언이 불시착한 에덴의 변방

음영의 굴곡이 짙을수록 퇴장은 흔한 일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초기화되고

겹이 아니면 없을 것도 아니다


꼿꼿이 수작업인 명장의 밑그림

시종始終행간을 펼쳐 경영이 운영된다


영원도 차례에


서재를 베끼다전문 인용


가령가장 낮은 자세에서 하늘을 보면 하늘과 멀어진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아니다오히려 가장 낮은 자세에서 보는 하늘은 더 넓고 깊고 더 푸르게 보이는 법이다. /보기에 좋았다/라는 말은 성경의 말씀이다성경을 배제하고 사람의 경지에서 다시 생각해 본다보기에 좋으면 된 것이다어떤 종류의 감각이든 사물이든 현상이든 내 보기에 좋았으면 그뿐이다.


내가 보기에 좋았으면 타인의 눈에도 좋게 보이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아닌 경우도 존재하지만 대개 좋은 느낌이란 공유와 울림이라는 전제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시인이 작품에서 말하는 서재는 온갖 책의 보고인 서재도 서재지만 세상 만물의 이치가 존재하는 곳도 서재이며우주와 하늘도 서재이다그 속에는 우리가 측량 못 할 단위의 별이 살아 있으며 그 음영의 어딘가에 또 다른 별의 무리가 보기에 좋았다고 말하는 별이 존재할 것이다먼저 되고 나중 되고 나중 되고 먼저 된 것의 순서는 중요하지 않다그 의미와 진리가 가득한 서재를 베끼는 것서재라고 보는 것서재에서 사유의 깊이를 늘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시인은 본문 속에서 /사악은 유언이 불시착한 에덴의 변방/이라는 말을 한다매우 중요한 말이다간사하고 악독한 것은 절대자의 유언이 불시착한 에덴의 변방이다그곳에 존재하는 것은 사악을 견뎌내는 극렬한 생명력견뎌내며 경쟁하는 Ego 적인 존재만 가득한 곳이다사람이 사는 세상은 이타적인 배려와 보기에 좋았다는 선한 영향력의 말이 운행되는 곳이다.


꼿꼿이 수작업인 명장의 밑그림

시종始終행간을 펼쳐 경영이 운영된다


영원도 차례에


서재를 베끼다부분 인용


수작업명장의 밑그림시종 행간을 펼쳐 경영이 운영된다는 말은 섭리라고 해석하면 좋을 것이다자연계를 지배하고 있는 원리와 법칙 혹은 세상과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하느님의 뜻을 섭리라고 한다행간이라는 복잡한 세상의 운행을 경영으로 운영하는 것그것에 순종하고 그 서재 속에서 나를 성찰하는 일그 모든 것이 넉넉한 우주라는 시인의 말로 대변하고 있다시인의 머무는 서재를 훔쳐보고 싶다몰래 찾아가 섭리를 설파하는 묵음의 고백을 듣고 싶어진다말보다 중요한 것은 묵음이다행동이며 실천이며 지긋한 눈의 시울이다그 한편에 묵묵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송병호 시인의 가슴이 온통 지혜롭다본문의 말처럼 간혹 항로를 이탈한 별은 죽지만 수시로 채우고 비우는 우주의 뒷면은 같은 것이 다른 것으로 정돈될 것이다절창이다.


이방인들의 빈칸



성당에 내리는 첨탑의 기도문


신작로 갓길 배부른 중년 남자

기타 치며 노래를 부른다


짙은 선글라스는 어느 방향일까


무표정한 안내견

턱을 늘리고 발자국을 포착한다


초라한 것은 초라한 것을 만나

더 초라하게 보이는 것처럼


하루 죽고 하루 살아서 낭만이 아니다

사막을 건너온 가나안의 이방인


기다리는 곳은 방치된 미궁의 미래일 뿐

종추의 성대는 녹이 슬었다


짐칸에 실린 비곗덩어리의 허기

신의 여분은 얼마나 될까


어쩌면 빈칸일지도 모른다


이방인들의 빈칸전문 인용

***

신작로 갓길 배부른 중년 남자

기타 치며 노래를 부른다


초라한 것은 초라한 것을 만나

더 초라하게 보이는 것처럼


하루 죽고 하루 살아서 낭만이 아니다


이방인들의 빈칸일부 인용


이방인이라는 것의 기준은 다른 나라 사람 혹은 나와 다른 사람삶의 경계가 나와 같지 않은 사람다른 말로는 유대인의 선민의식에서 비롯된 다른 민족을 낮게 부르는 말이기도 하다좀 더 좁힌 협의의 이방인은 삶의 가치관이 나와우리와 다른 사람을 이야기하는 말이다본문을 인용하고 다른 부분을 부분 인용한 이유다초라한 것은 초라한 것을 만나더 초라하게 보이는 것처럼/이라는 말은 중요한 말이다깊은 사념에서 비롯된 삶의 관조가 섞인 행간이다이방인은 어쩌면 우리가 이방인으로 보는 시선을 이방인의 시선이라고 볼지도 모른다마치 초라한 것은 초라한 것을 만나 더 초라하게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그래서 시인은 말한다. /하루 죽고 하루 살아서 낭만이 아니다심도 있는 말이다낭만과 이방인나와 이방인이방인과 이방인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중요한 말이다어쩌면 나도 그들에게 이방으로 보일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결국 이방인이란 복속이나 족속이 아닌편향된 사고의 결과물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빈칸과 짐칸의 간극무엇이 짐칸이며 무엇이 빈칸일 것인가시인의 결구가 무척 흥미롭다. /신의 여분은 얼마나 될까어쩌면 빈칸일지도 모른다무거운 화두를 쉽게 던진다송병호 시인이 세상을 보는 방정식이다또 다른 작품에서도 엿볼 수 있는 가치관을 몇 부분 소개한다.


낭만은 폐업이 아니다

슬럼프에 빠진 물길이

자기 소리로 새 길을 내는 것처럼

바람의 무게를

꿰뚫어 보는 시인의 언어


간이역의 괄호에 앉아일부 인용


가끔아주 가끔 종이비행기에 싣고 동네 한 바퀴 돌아보지만 짝을 찾는 종달새의 고음이나 관악기 허밍으로 부르는 찬송가 한 소절은 빛일까독침이 찔린 어젯밤 기사에 빙빙 도는 모가지 꺾인 풍뎅이내가나는 사람 똥을 싸는 미친개였다


왜 잘 죽었다는 말은 없는지

이제 알았다


나는 가끔 나를 안다일부 인용


이방인들의 빈칸에서처럼 일부 인용한 작품들의 면면에서 송병호 시인이 눈을 느낀다시인이 바라보는 세상은 편협이나 편향이 아닌포용과 배려와 흡수다냉정한 자기반성에서 기인한 관계의 속성에 대한 자신만의 언어로 부려진 또 다른 하나의 빈칸이다비어있다는 것은 채울 희망이 있다는 말이다다 갖춘 것은 포만이며 욕심이며 일탈이다장에 탈이 나면 약보다 먼저 굶어야 한다비워야 다시 채울 수 있는 것이 삶의 이치다나는 가끔 나를 안다에서 볼 수 있듯 반성에 기반한 성찰의 무게는 울림을 준다깊은 울림을그 울림 속에서 내가 나를 반추하는 동력을 얻을 수 있다나로 인해나부터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순간 이미 좋은 시인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반대의 경우아무리 좋은 작품을 써도 결국 나는 사람 똥을 싸는 미친개였다가 될 수밖에 없다그 반성과 성찰의 무게를 잘 그린 작품을 한 편 소개한다.


문득 타인



벚나무 옹이에 발톱이 낀 쓰름매미

쓰를 쓰름 서럽게도 운다


긴 장마에 여름 같지 않은 여름

연주회는 이제 시작인데

입추지절 헐렁한 객석은 표정이 없다


칠 년 동안 도달한 외계는 낯선 섬

그도 고작 두어 달 남짓서럽겠다


나는 어느 때는 혼자였다

소리 내 울 때도 있었다


느낌이란 볼 수 없어도 보인다

바위 같은 중심이 기울 때

하늘 같던 우리가 한순간에 무너질 때


자존심이 막장을 칠 때


문득 타인전문 인용


매미가 허물을 벗기까지 7년의 세월을 인내하고 땅속에서 살다 겨우 두어 달 남짓세상을 비행하다맘껏 울다간다사람은사람의 나이 기준이 아닌 우주의 운행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우리 역시 매미와 별반 다를 바 없다고작 백 년이란 시간은 40억 년이 넘는 지구의 시간에 비례하면우주에 수많이 반짝이는 별들의 개수에 비례하면행성과 행성 간의 거리에 비례하면우리는 문득 내게서 타인이 된다.


나는 어느 때는 혼자였다

소리 내 울 때도 있었다


어쩌면 언제나 혼자였는지 모른다어쩌면 자주 소리 내 울 때도 있었는지 모른다다만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일지도 모른다군중 속의 아우성광장사람들이 모든 것이 허상일지도 모른다눈만 감으면 사라지는 또 하나의 꿈속그 꿈의 인셉션 Inception의 세상인지도 모른다타인이라는 말은 매우 중요한 말이다관계에서 나에게서 가족에게서 느껴지는 고독의 무게는 제각각 다르겠지만 결국 나는 혼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하지만 그 결국이라는 것의 시선의 끝에는 지나친 에고이즘이 자리하고 있다사는 내내 타인이 아니고사는 내내 내게서 내가 이방인이 아니고 사는 내내당신에게서 내가 타인이 아니듯, ‘문득의 범주 속 타인이라는 말이다그런 때조차 타인에서 벗어나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다잠시의 고통이라고잠시의 울음이라고나도 그랬었다고우리는 영원한 타인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그런 시인의 배려가 가을을 새롭게 편집하지 않도록 유도한다가을은 가을답게소리 내 울어도 좋은 가을이라고혼자라고 오롯이 앉아 있어도빈칸의 어느 구석에서 그저 가만히 앉아 있어도 당신은 내게서 타인이 아니라고 시인의 속삭임이 들리는 듯하다.


송병호 시인의 작품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은 사람 냄새다좌우로 이념이 치우친 것이 아닌 중도의 중용을 아는 정직한 사람 냄새다시 세계를 논하기 전에 생각할 것이 바로 그런 점들이다그래야 시인을 제대로 알고 볼 수 있는 것이다글이 아닌글 속의 송병호 시인을.


맺으며


가령 무제의 입장에서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본다시집 제목이 깊다우렁한 사유의 무게를 담지하고 있다무제의 입장이라는 말이 가슴을 헤집는다우린 과연 정확한 명칭이나 호칭을 부여하거나 부여받고 사는 것일까제목을 붙일 수 있는 것이 제목을 붙일 수 없는 것과의 결계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 가을의 너른 벌판에서 차 한잔 우려내며 곰곰이 생각해 볼 문제인 것 같다시문학은 감성의 문학이며 감수성의 행간이며 관계의 버팀목이 되어야 한다더 큰 것보다 더 작은 것을 볼 줄 아는 시인의 시선이 필요한 요즘 시대다곳곳이 병목화 된 채로 신음하고 있다마른 계절로 만드는 것은 사람의 가슴일지도 모른다사랑하고 이해하며 용서하며 산다는 것은 대단히 쉬운 말이다대단히 쉬운 말일수록 실천하기 힘들다송병호 시인의 시집에서 배울 점이 그것이다대단히 쉬운 것에 대한 배움이다문장 주의에 의존할수록 시는 낮은 자세에서 하늘을 보는 것이 아니라 높은 곳에서 하늘을 보는 것이다동등은 동질이며 같은 질량의 무게를 가진 천칭 저울이 될 때 완벽한 수평을 이루게 된다이 좋은 계절에 발간하는 송병호 시인의 네 번째 시집 가령 무제의 입장에서를 읽다 보면 알게 된다당신의 시선이 나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경륜에서 비롯된 깨우침이 완고한 독백보다 더 곡진한 묵음이라는 것을마지막으로 3월에 비가 내리면을 소개하며 시집 서평을 맺는다. (김부회)


3월에 비가 내리면

결혼기념일




3월의 비는 꽃들로 태를 공모한다


찻잔을 감싼 여자와 호흡을 다듬는 비

비는 저울 눈금의 속임수처럼

오차를 허용하지 않는

신과의 마지막 계약인지도 모른다


여자는 감정이 뜸한 비와 연애 중이다

연애는 비옷 같아서 맞는 것이 없다


말은 살아서 밤을 태운

산술적 동거의 시간

사랑을 생산하는 향기의 과정을

서술하는 고충의 창일까

골격만 남은 화석처럼

시원의 은유는 축시가 되지 못했다


카페를 나온 여자는 손바닥을 뒤집어

빗물의 체온을 채록한다


빨간 하이힐이 젖은 비닐우산과

짙어가는 네온과 신작로의 반짝이는 것들

핑계로 묻어간 살결 속 이야기

퍼즐을 맞춰가는 그런 날


그도 빚이려니

장미 한 송이 사 가야겠다


송병호 프로필


2018년 예술세계, 2019년 국민일보 신춘문예/2020년 『문학예술』 평론

시집 『궁핍의 자유』 『환유의 법칙』 『괄호는 다음을 예약한다』 『가령 무제의 입장에서

제14회 김포문학상 대상, 제10회 중봉조헌문학상, 제1회 강원일보 DMZ문학상 수상, 가천문화재단, 김포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창작준비금 선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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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호 시인,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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