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젓한 숲길로의 초대
2014년 《애지》로 등단하여 시집으로 『현관문은 블랙홀이다』, 『철의 시대 이야기』를 발간한 남상진 시인이, 독자들을 호젓한 숲갈로 초대했다. 바로 『나무라 불러도괜찮습니다』라는, 특이한 제목의 시집을 통해서다.
시인은 인터뷰에서, "이미 숲이란 이름으로 지어진 한 채의 집 안에서 또 다른 어설픈 집을 짓고 있는 나의 시는 아둔하기 짝이 없다."며 수줍게 고백하는데 "살아가는 일이 미완의 집 한 채 짓다 돌아가는 일이라면 시는 그 집의 서까래거나 대문이거나 식탁 위에 나뒹구는 건강보조식품쯤 될까?"라는 겸손에서 출발한다.
이 시집을 천천히 읽으면서 그가 초대한 숲길의 냄새와 색깔, 온도와 간절한 충만함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리고 농도 짙은 바람은 이 어디쯤일까, 그 바람의 결을 어루만지며 상상해본다.
시인은 제11회 〈리얼리스트 민들레문학상〉, 제7회 〈애지작품상〉을 수상한바 있다.
◨ 해설 들여다보기
“마음의 고요함으로 가는 길”
여기 한 사람이 있다. 보편적인 성공의 기준에 맞춰 인간의 삶을 재단해야만 한다면 그는 실패한 자에 가까울지 모른다. 살아가는 내내 자신이 태어난 시골의 경계를 넘지 않았고 생의 많은 시간을 고독 속에서 소요하며 보냈다. 이웃들은 그런 그를 괴팍한 은둔자라고 불렀다. 그 자신도 스스로를 가정교사, 측량사, 정원사, 농부, 그리고 엉터리 시인이라고 평가하였다.
다만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십 년 후, 사람들은 흔적으로만 남은 그의 집터에 돌탑을 쌓으며 뒤늦게 그를 추억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더 긴 시간이 흐른 2020년대의 초입에서는 그 사람에 관한 이런 이야기가 많은 이의 외로운 마음 안에서 포개어졌다.
“우리는 소로가 창안한 ‘건설적인 고독’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And we can learn a lot from what Thoreau created from it: constructive solitude).”
2020년 봄 《뉴욕타임즈》에는 ‘그 사람’, 바로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의 삶과 태도를 재발견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의 글이 실렸다. 그 글의 필자는 거기에 ‘건설적인 고독’이라는 표현을 남겨두었는데, 당시 이 말에 공감을 표시하는 이가 많았던 이유는 그때의 우리가 격리가 일상이자 미덕이 된 감염병 시대의 주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후로 시간은 다시금 한참을 흘러 오늘에 도착했지만 우리는 여전히 소로를 읽고 그의 고독을 돌이킨다.
매사추세츠주 콩코드 마을 근처의 월든 호숫가. 그 땅을 빌려 통나무 집을 짓고 홀로 사는 동안 소로는 생존을 위한 활동을 최소한으로 줄였다. 대신 자기에 관한 사유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기로 했다. 어떻게 살지, 가치 있는 삶이란 무엇인지 찾기 위해 의도적으로 자신을 유폐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종종 은둔자나 염세주의자로 오인되기도 하지만 사실 그의 고립은 주변과의 철저한 단절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그 기간 동안 사람과 자연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했다. 물질, 편의, 발전 등의 단어로 점철된 문명 속에서 도리어 본질을 잃어가는 자신과 이웃을 아프게 떠올렸고, 인간이 상실한 것을 되찾기 위해 사위의 자연을 섬세하게 바라보았다. 계절의 변화와 함께 높아지고 낮아지는 호수의 수심이나 수다한 새들과 곤충들, 그들을 키워내는 나무 같은 것을 말이다.
그런 연후에 그가 도착한 결론이 이와 같았다. 자연은 사람이 망각한 본성을 지니고 있기에 우리는 그를 가까이해야 하며, 그와 닮기 위해 애쓰다 보면 잃어버린 소중한 것들을 되찾게 되리라는 것. 소로의 고독이 건설적이었던 까닭은, 문명을 이탈하여 자연 속으로 들어간 그가 이처럼 인공의 삶 안에서 희미해져 가는 중요한 진리를 새삼 붙들었기 때문이다.
남상진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이 바로 이러한 소로의 사색을 떠올리게 한다. 시집에 누벼진 화자들은 자신을 비롯한 인간의 삶을 성찰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건설적인 고독 안에 거주한다. 이 숙고의 과정에서 돋을새김 되는 것이 물, 비, 나무, 숲 등의 이미지인데 이는 단순히 화자 외부에 놓인 환경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 이때의 자연은 문명화된 인간의 반대편에 놓인 것, 그리하여 인간이 회복해야 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기꺼이 알려주는 인도자에 가까워 보인다. 언젠가의 소로를 깨운 그 빛나는 월든의 호숫가처럼 말이다.
돌아보는 얼굴은
모두
내가
지나온 채널
눈 감으면
팔이 긴 나무가 나를 데려간다
나는 숲에서 논다
울면서 웃으면서
그늘은 흘리기도 한다
기억나지 않는
새, 나무, 얼굴들
어둠으로 버무려진 숲은
맨 처음 방처럼 아늑하다
서러운 행간을
침묵으로 견디면
유효기간은 금세 지나간다
날아오른 밤새의
먹이가 되고 남은 별들은
키가 작은 나무가 되기도 한다
혼자일 때
거울을 들여다보면
검은 얼굴의 나무 한 그루
긴 팔을 내두르며 걸어간다
꿈속에서 잃어버린
내 뒷모습
한 토막인지도 모른다
- 「검은 숲」 전문
시집의 진입로에서 「검은 숲」을 먼저 꺼내드는 것이 좋겠다. 이 시가, 시집 전체에 가로놓인 자연의 함의를 생각하게 하는 까닭이다. 첫 연에서 화자는 어떤 반추의 순간에 놓여 있다. “돌아보는 얼굴”과 “모두”, “내가”, “지나온 채널” 사이에 가로놓인 깊고도 넓은 행간이, 지나온 세월을 회한 속에서 천천히 돌아다보는 화자의 모습을 그려보게 한다. 그 회고의 여정 끝에서 화자가 문득 눈을 감았을 때 “팔이 긴 나무”는 그를 숲으로 데려간다.
여기서 ‘나’를 감싸 숲으로 데려가는 나무는, 그를 내면 깊은 곳으로 인도하는 다감한 안내자처럼 보인다. 그러고 보면 그럴 때가 있다. 비탈진 일상 위을 허정허정 걷다 지쳐버린 마음을 말리기 위해, 우리는 한갓진 숲의 복판이나 강의 기슭, 적막한 바다의 모래를 찾아 헤매기도 하는 것이다. 팔이 긴 나무의 이미지는 그러한 순간을 환기하는데, 자연은 이처럼 인간의 외면보다는 내면과 접속하는 장소 - 내면으로 난 비밀스러운 문을 열어주는 매개가 되곤 한다.
이 시의 ‘나’가 나무를 따라 도착한 숲 또한 자신의 내면이어서 그는 “어둠으로 버무려진 숲”에서도 두려움보다는 아늑함을 느끼며 논다. 다만 그의 놀이에는 웃음뿐 아니라 울음도 동반되는데 숲에 ‘나’의 비애가 고여 있기 때문이다. 바쁘게 흘러가는 생활은 우리에게서 슬픔을 토로할 기회조차 앗아가곤 하지만, 그렇게 삼켜진 슬픔은 사라지는 대신 우리의 마음에 고여 “서러운 행간”으로 남기 마련이다.
그러나 나무가 ‘나’를 내면의 설움과 직면하게 하는 이유는, 화자가 고통에 잠식당하기를 바라서가 아닌 것이다. 심연의 아픔과 괴로움을 마주하고 감내할 용기를 지닌 이에게 그것의 유효기간은 그다지 길지 않거니와, 그 견딤의 경험이 삶에 이롭게 남아 미래의 자신을 위한 동력이 되어주는 까닭이다. 이를테면 어둠 속에서 ‘나’를 다시금 날아오르게도(“밤새의/먹이가 되고”) ‘나’를 겸허하게, 단단하게 살아가게 할 수도 있겠다(“키가 작은 나무가 되기도 한다”).
비가 오는 밤은 울기에 좋다
오늘의 짐을 내려놓고
어둠 속에 서면
빗물이 나를 안고 흘러간다
살아서는 벗어날 수 없는 오늘과
처음부터 물이었을 모든 빗방울의 과거와
어둠이 걷히면 발각될 팅팅 불은 슬픔과
먹구름이 물러간 잠깐 동안
키가 큰 종족처럼
허리를 굽혀
혓바닥으로
발등을 핥을 수 있었다면
나는 이미
물이 되어 있을 것이다
- 「혼자 비를 만났습니다」 전문
「검은 숲」에서 ‘나’를 내면의 숲으로 이끄는 나무의 이미지는 「혼자 비를 만났습니다」에 이르러 내리는 비의 형상으로 변주된다. 옮긴 시의 ‘나’는 비가 내리는 날을 골라 혼자 울기로 한다. 비와 눈물이 같은 성질의 것이어서 앞의 것이 뒤의 것을 부르는 까닭이다. “모든 빗방울”은 처음에는 어디든지 흘러갈 수 있는 자유로운 물이었겠다. 그러나 비는 지상에 내린 물, 지상의 중력이라는 운명에 따라 수직하강해야 하는 물이다. 인간 또한 그와 다르지 않아서 “살아서는 벗어날 수 없는 오늘”의 중력이 ‘나’를 생활 안에 정박시킬 때 고단하고 외로운 ‘나’는 속절없이 눈물을 흘린다.
다만 비 내리는 날은 ‘나’가 “오늘의 짐을 내려놓고” 울면서 “어둠이 걷히면 발각될 팅팅 불은 슬픔”에 장악된 내면 깊숙이 발을 들이는 날이기도 하다. 그리고 거듭하지만 인간이 자신의 내부 세계와 깊이 조우할 수 있을 때, “먹구름이 물러간 잠깐 동안”일지라도 자신의 고통에 직면할 수 있을 때, 그 경험은 제 주인을 성숙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이다.
이 시의 화자가 마지막 연에 이르러 “키가 큰 종족”이 되는 상상력 속에 자신을 두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는 희망한다. 키가 커질수록, 즉 성장한다고 해서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드는 오만한 자가 아니라, 갈수록 겸허해진 끝에 “허리를 굽혀” 가장 낮은 곳의 “발등을 핥는” 자가 될 수 있기를
- 전소영 문학평론가 해설 중에서
작가약력
경북 상주에서 출생했으며, 경남대학교를 졸업했다. 2014년 《애지》로 등단, 2008년 시흥문학상, 2009년 민들레문학상을 수상했다. 2017년 시집 『현관문은 블랙홀이다』가 세종나눔도서로 선정되었다. 현재 영남시 동인, 시산맥 회원, 민들레문학회, 경남문인협회. 마산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