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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시집 『안부를 묻는 밤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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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코스모스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549회 작성일 19-07-27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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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시간/정 선



1

남자는 소 몸에 찍힌 푸른 번호가 사형수의 번호 같다고 생각했다

 

제비추리로, 양지머리로 대접살로 차돌박이로, 아롱사태로, 채끝으로, 홍두깨살로, 잘 발라진

살덩어리들이 갈고리에 걸려 있다 가게를 지나칠 때마다 몸이 고깃덩어리로 발라진 것 같은 착

각에 몸서리를 친다 허나 생이란 저렇듯 붉어야 하고 죽어서까지 부위별로 쓸모가 있어야 한다

고 자신을 한 번 뒤돌아보는 것이다

   

 2

기계에 잘려 나간 손가락이 아리는 밤 허투루 내동댕이쳤던 날들을 헹궈 수없이 무두질했던 남

자는 부위별로 발라진 고기들을 냉동차에 싣고 달린다 밟힐수록 시간은 날개가 돋는다 남자는

자신의 몸을 소처럼 나누어 본다 때때로 토막 난 살덩어리에서는 비린내가 난다 갈비뼈에 붙은

살점은 씹을수록 달콤하고 꼬릿살은 아직도 쇠파리 쫓는 채찍만큼 힘이 있고 사골뼈는 금방이

라도 불끈 일어나 도로를 질주할 것만 같다

 

남자는 이왕 정육점 진열장에 걸릴 거면 뒷다릿살로 걸렸으면 싶다 뒷심이 없어 털푸덕 주저앉

고야 마는 세상 냉동이 풀리는 날 두 다리로 버티는 땅엔 숨은 촉들이 올라오고 가죽은 탱탱한

북소리로 태어나고 촛불을 밝혔던 기름은 동종을 만들고 시뻘건 피는 아침을 해장시키고 가랑

이에서는 소 울음 우렁우렁할 것을

 

변기는 변기가 아니다/정 선

 


아파트 정문 담벼락 옆

깨진 변기가 버려져 있어요

그 속에 강아지풀이 오고 가는 사람들을 지켜봐요

제 몫 다하느라 땡볕 아래 땀을 흘려요

태어난 대로 깜냥대로

옳거니

변기를 똥오줌 받는 그릇이라고만 생각한다면 무슨 재미있겠어요?

마그리뜨라면 변기통을 성채처럼 구름 위에 세우고

붉은 유도화 꽂았을 것을

나는 이제

노랑 빨강 초록 변기에 돼지국밥을 말겠어요

보셨죠, 잘록한 허리와 펑퍼짐한 아가리 매끈한 피부

어디 하나 빠질 데라곤 없는데

뚜껑을 열면 김이 날름날름 피어오르는 벌건 국물,

살맛 입맛 돋우고

한겨울 몸을 데우는 데 제격 아닌가요?

육십 넘은 할아버지가 찢어진 청바지를 입은들

바오밥나무가 뿌리 뻗어 하늘을 넘본들 누가 말리겠어요

색안경을 쓰세요

박힌 생각들을 배배 꼬세요

한 사내의 시큼한 배설물을

얼마 전까지 온몸으로 받아냈을 오지랖

달항아리를 꿈꾸지 않는 넉살 푸짐한

썩 괜찮은 놈 이야기지요

 

날것 그대로/정 선                                

 


횟집 주인이 비닐 씌운 그릇을 가져온다

머리를 한 번 들이밀다 옆으로 꼬부라지는 새우

비닐을 벗겨내자

한 대접의 갯내음이 풍긴다

엄지와 검지로 몸통을 꽉 잡고

파당거리는 머리를 뜯어내고 돌려가며 껍질을 깐다

새우 등에 있는 내장이 이쑤시개에 한 줄로 따라온다

무지갯빛이 감도는 살덩이

초장을 찍어 한입에 넣는다

입 안 가득

새우가 헤엄쳐 온 바다가 푸들푸들 살아 있다

 

날것에서는 씹을수록 단내가 난다

 

아파트의 삼층 여자는

순하다고 소문난 남편에게 매를 맞았다

악을 쓰며 대드는 여자는 짐승처럼 울었다

이틀 후 여자는 시퍼런 눈을 가리고

남편의 팔짱을 끼고 시장엘 다녀오곤 했다

갈고 다듬지도, 조미료를 치지도 않은

그들의 뒷모습엔 서로 할퀸 발톱 자국이

어느새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말갈기처럼 쓰러졌다 일어나는 날것의 생 속엔

배추 풋비린내가 난다

고무통 속 부대끼는 미꾸라지들 살냄새가 난다

 

마른 몸을 열어/정 선

오이도 낙조대 오르며 미라를 꿈꾼다

염치없이 날마다 불어나는 몸

세계를 수축시킬 수 없다면 내장 꺼내어 바닷바람에 널고

차라리 몸 말려 아픔을 줄여가리

식량은 밥도 빵도 아니다

향기로운 말씀이다 공기다

하는 일이란

호두껍질 속에서 미로찾기를 하거나

헉헉대는 할머니의 허리 굽은 숨을 넋 놓고 바라보는 일

꼴찌로 돌계단을 내려오던 다운증후군의 아이는

도시락을 준다는 선생님의 말에 다다다 달려간다

아이는 아직 잘 모른다

무거운 몸은 내 몸이 아니라는 걸

고통을 쓸어내리면 껍질처럼 가벼워진다는 걸

가벼워져야만이 나를 공기 중에 띄울 수 있다

말라야만이 몸을 내 속에 가둘 수 있다

싸리빗자루 파도는 뱃속 쓴물을 긁어내고

바다는 검은 배꼽을 말리고 있다

이제 하늘 향하여 가부좌 틀고

소나무 껍질을 씹는 일이 내게 남은 일

주름거죽에서 터져 나온 솔씨들 하얗게 날아간다

뻗쳐오르는 살을 환도뼈에 깊숙이 구겨 넣고

나는

부릅뜬 눈으로 수축된 문장들을 읽어야겠다

부들이 마른 몸 켜는 소리 들으며

 

저 폐닭 위로 내리는/정 선

 


상남 시장 좌판 위에

허벅지에 살이 잔뜩 오른 닭들

연분홍빛 몸뚱이를 뽐내고 있다

생닭 한 마리 4500

그 옆 폐닭은 두 마리에 3000원이라고 써 있다

폐닭이라?

문이 닫힌 닭인가

큰 몸뚱이는 거무튀튀하고

처진 목에 닭살이 오톨도톨하다

폐닭 위로 예순을 바라보는 한 여자의 얼굴이 얼비치는데

한 번도 제 젖을 아기에게 못 물려본 응어리가

폐부 깊숙한 곳에 박혔다가 웃음으로 쏟아진다

굵직한 소리로 호탕하게 웃어제끼는

그 여자의 목젖 속에는 햇살이 고여 출렁거린다

아랫입술과 윗입술이 밀어낼 듯 만나 부딪치다

-

바람 빠진 타이어처럼 주저앉는 말

폐가폐수폐차폐업폐문폐회식폐경기 폐 허

속에는 기름기 빠진 발뒤꿈치처럼 꺼칠한

뼛속 뚫린 날들이 숨어 있다

입 안에 모은 온갖 기를

바깥으로 힘차게 보냄과 동시에

짧은 호흡으로 금세 흩어지는

폐, 폐, 폐

밭은기침을 해대는

<<정 선 시인 약력>>


*전남 함평 출생.

*전남대 국문학과 졸업.

*2006년 《작가세계》를 통해 등단.

*시집 『랭보는 오줌발이 짧았다』(천년의시작, 2010).

*에세이집 『내 몸 속에는 서랍이 달그락거린다』.







지난 2006년 ‘작가세계’로 등단한 정선 시인이 ‘안부를 묻는 밤이 있었다’를 펴냈다.

등단 13년 만에 두 번째 시집을 출간한 것에서 보듯 이번 작품집에는 오랫동안 세공을 한 참신한 비유와 치열한 열정이 녹아 있는 시들이 수록돼 있다. ‘보라는 아프다’, ‘우물, 그 감정사막’, ‘고도는 매일 온다’, ‘씨앗’ 등 모두 40여 편의 시는 그러한 시적 성취를 가늠할 수 있는 수작들이다. 이번 작품집에서 시인은 지적 사유를 매개로 사랑이라는 감정의 실체를 투사한다. 이를 통해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의 유폐된 감정과 외로움을 매혹적으로 그려낸다.  

“눈썹 하나에 모독들/ 눈썹 하나에 회오리들/ 눈썹 하나에, 눈썹 하나에…/ 떨군다/ 뭉개진다/ 가슴 아픈 간격들/ 비로소 나는 가을문둥이/ 안부가 비껴가자/ 그물에 걸린다 연애의 가능성들/ 주파수를 변경하는 침묵들…”(‘어슬렁어슬렁 어슬렁’ 중에서) 
 

위 시 ‘어슬렁어슬렁 어슬렁’은 시인의 고백이 반영된 작품이다. 화자의 내면을 향하는 성찰적 시선은 깊고 담담하다.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과정은 압축적이면서도 아련하다. 김병호 시인(협성대 교수)은 “대상으로서의 사랑을 지우고 그 자리를 대신하는 궁극들. 결국 사랑에 대한 집요한 성찰을 통해 시인은 안과 바깥, 본질과 주변이 나누어지지 않은 온전한 비율(非律)적 사랑을 어슬렁거린다”고 평한다.

< 문학수첩·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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