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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겨리 시집 『 나무가 무게를 버릴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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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코스모스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417회 작성일 19-11-01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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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무게를 버릴 때
 

바람이 통통해지는 무렵 나무가 그늘을 방생하는 것은 
그늘의 이소離巢  
그늘은 때가 되면 나무를 떠나지만 증표로 나이테를 남긴다  
  

그늘이 성근 것은 계절이 빠져나간 흔적이다  
적멸을 횡단하는 경로에서 나무가 비명을 지르지 않는 건  
그늘이 나무의 공전을 멈출 때 울음도 자전을 멈추기 때문이다 
 

나무는 상처 난 그늘을 다시 촘촘하게 여밀 테지만  
나무가 그늘을 수습하는 건    
자신의 부고를 담담하게 진술하는 수행이다 
 

일설에는 그늘은 나무의 다비라는데,
    

아무도 나무를 관통할 수는 없다  
나무가 짊어진 그늘의 생애를 다 해독할 때까지
 

앙상한 그늘을 덮고 벌레들이 쉼표처럼 잠들어 있다  
그늘 밖으로 삐져나온 맨발을 달빛이 슬쩍 밀어 넣는다  
달빛의 인기척에 놀라 나무가 지느러미를 퍼덕거릴 때  
그늘이 우수수 쏟아지고 나무의 쇄골이 드러난다
 

초록의 씨줄과 날줄로 한 땀 한 땀 공들여 지은 수의壽衣,  
생애가 오체투지인 나무의 텅 빈 폐허에서  
새들이 아직 이소하지 못한 몇 조각의 그늘을 포란하고 있다 
 
  


향긋한 건축 
 
 
내 생의 목록에 편집된 물음표 하나, 설계도 없는 건축 
그대는 내게 건축학적인 고백이었다 
물방울에 새긴 조각처럼 투명한 그늘을 밑바탕으로 깔아 놓고  
독학으로 익힌 설계도면에는 고뇌와 절망과 그리움까지
주먹장이음 공법으로 정교하게 설계에 반영하였다 
나뭇결을 풀어 빛깔과 언어를 매일 숙성시키며 
디딤돌에 골백번도 넘게 먹줄을 그었다 
먹통은 온통 검은 표정이어서 어느 게 문장이고 어느 게 속내인지 
너덜너덜해진 시력부터 발톱까지 하르르 떨어지는 벚꽃 같았다 
검은 벚꽃 본 적 있나? 그건 벚꽃이 혀로 제 몸내를 핥은 자국,  
꽃은 바라보는 각도의 문제였다 
아무튼 벚꽃이 만개한 나무로 대들보를 세웠다 
벚꽃 한 잎 한 잎에도 나무의 신경이 퍼져 있을 거라 생각했다 
저 우수수한 꽃들 중 한 송이쯤이야 뭐 그리 대수이겠냐 마는 
한 송이 떨어질 때도 나무는 온몸으로 흔들리는 법 
밑동까지 흔들려 뿌리까지 저리지 않았을까 
꽃잎이 떨어질 때 허공을 곡선으로 베는  
건축의 상처란 공법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그대는 내게 한 송이 꽃이었다 딱 한 송이만 피우는 공법으로 
평생 딱 한 번만 피우고 고목이 된 어떤 나무에 대한 
전설을 설계도에 반영하듯 그대는, 백미였다 
물수제비 공법으로 핀 꽃은 
가급적 멀리 향을 보내기 위해 개발된 신공법 
그대란 씨앗 한 톨 발아하기 위해 허공을 모두 뜯어내고  
바람의 골조로 지은 집 한 채 
통째로 열린 창문으로 나뭇잎이 낙관처럼 떨어지는 
달빛이 문패인 집 
 


 
바람은 꽃의 뼈  
  
  
뼈가 향기나 소리나 빛깔로 이루어진 것들은  
관절이나 근육으로 된 골격보다 훨씬 더 조직적이다  
무골로 된 뼈들은 박히면 빠지지 않는 비수다
바람을 발골하면 꽃의 의태어만 남는데
꽃말로 수습되기도 한다 
 

계절이 바람의 자세를 바꾸는 것은 꽃의 뼈의 진화 과정이다
향기가 짙다는 것은 꽃이 발기했다는 뜻인데 
해면체가 뼈보다 단단할 수 있는 것처럼
그 부드러움에 찔리면 치명상을 앓는다
 

꽃물이 드는 것은 바람에 찔리는 일, 통증의 잠복기는 풍속에 따르므로
 

푸른 도화선으로 도드라져 있는 손목의 동맥처럼 
누구나 다 쉽게 그을 수 있도록 배려한 꽃의 급소는
수술이나 암술이 아니라 바람의 결이다
씨방에서 손가락 한 마디쯤 아래, 꽃의 명치인 바람의 늑골
그 결에 찔려야 서서히 오래 고통스럽게 죽을 수 있다
 

모다깃비 지나간 길 위에 바람의 유골들이 흩어져 있다 
온몸을 던지는 바람의 투신은 속수무책이라서
무조건 당하는 게 상책,
가장 치명적인 것은 물드는 것
나는 지금 바람이라는 익명의 뼈에 깊숙이 찔린 채 
꽃을 견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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