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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규의 시론(1) - 시는 시를 기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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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268회 작성일 15-11-05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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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는 시를 기다리지 않는다



<시는 시를 기다리지 않는다(?)->
이 말은 어느 시학교수의 강의실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다. 정확하게는 김인환 교수의 대학원 강의 중의 한 대목이었다는 한 젊은 시학도의 전언을 통해 나는 이 말과 극적으로 만났다. 그렇다. <극적으로>이다. 그 순간 나는 전율했다. 이 말이 떨어지는 순간, 탄력으로 높게 솟아오르다가 잔잔한 충만의 물살로 가득해졌을 그 강의실의 공간도 그대로 눈앞에 다가왔다. 한 정신이나 감성에 대하여 이렇게 내 몸이 관능으로 활짝 열린 감응을 보일 때가 나는 제일 행복하다.
나는 그 말을 그대로 내 노트에 옮겨 적었다.

<시는 시를 기다리지 않는다.>
앞의 <시>는 대문자로, 뒤의 <시>는 소문자로 구분해 적었다.(알파벳처럼 음소 단위로 구분해 적을 수 있는 기호가 없는 우리 문자가 이럴 때는 사뭇 불편하다.) 그 말에 대한 풀이를 더는 듣지 못했지만, 아마도 앞의 <시>는 글쓰기 이전의 시를, 뒤의 <시>는 글쓰기 자체로서의 시를 뜻하는 것이었음을 짐작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문자 이전의 시, 그것은 다만 싱싱한 혼돈일 뿐 시는 아니지 않는가라는 질문이 빠르게 내 안에서 고개를 들었고, <기다리지 않는다>는 말에서는 글쓰기로서의 시 자체에 대한 가치폄하의 뉘앙스가 느껴지지 않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바로 그 <싱싱한 혼돈>이라는 생각이 앞섰다.
요즈음 우리 시 속의 사물들이나 상황은 너무 글쓰기에 갇혀 있다. <시>는 없고 <시>만 있을 때가 더 많다. 비유도 그렇다. 좋은 시는 비유로 가두는 시가 아니라 비유로 열어주는 시일 터이다. 그래서 <섬광>이 없다. 설사 그것이 문자 이전의 <시>의 세계에 대한 <반복>과 <유사>, <복제>에 머문다 할지라도 그 원초적 일상의 싱그러움이 있는 시 쪽을 나는 지지한다. 까불지 않는 시가 좋다. 아무리 잘 쓴 시라고 해도 그것은 문자 이전의 <시>를 <배가>시키는 정도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미메시스>의 논리를 우리는 외면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다시 적었다.

시는 시를 기다리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가서 기댈 뿐이다.)

시가 시를 기다리기 때문에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댈 곳이 거기 있어 시라는 한 담화가 태어날 따름이라 나는 믿는다. 여기서 <기댄다>는 말은 의존이나 구원 따위의 도덕적 관념들과는 사뭇 다른 질감의 것이다. <기댄다>는 말 속에는 움직임이 있고 <살대임>이 있다. 이쪽의 모자람과 왜소함이 부끄럽게 느껴지게 하거나 그것들 때문에 이쪽이 주눅들게 하지 않는 넉넉함이 있다. 갇힘에서 열림으로 가는 은밀한 통로 하나를 허락받는 은근하고 따뜻한 눈짓이 있다. 혹은 첫 번째로 열리는 산뜻한 새벽공기가 있다.
무엇이 큰 <시>인가.
다음과 같은 시를 읽고 났을 때 나는 차라리 자유롭다. 적어도 원초적 일상의 싱그러움이 거기엔 있다. 우리가 무수히 지어 붙인 이름들로부터 그 상처들로부터 또한 자유롭다. 욕망으로부터 자유롭다. 우리가 가서 기대게 하는, 우리를 기다리지 않지만 우리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하는 바로 그 <시>가 무엇인가를 알게 한다.

터질 듯한 사과, 배와 바나나
구즈베리……이 모든 것들이
삶과 죽음의 말을 입 안으로 들이민다……알 만하구나……
어린이의 얼굴을 읽어 보아라,
어린이가 과일 맛을 볼 적에, 먼 곳에서 오는 이것이
그대들의 입 안에서 차츰 이름 없이 되지 않는가?
낱말이 있어 온 곳에 보물이 흐른다, 과육으로부터 느닷없이 해방되어.
-라이너 마리아 릴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제1부 VII부분

그렇다. 욕망의 이름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곳에 시가 있다.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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