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모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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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역국 한솥 끓인 엄마를 모시고 누나가 있는 집으로 간다.
한겨울에도 숨이 턱 막힐 방에 웅크린 채 앉아있는 누나
땀에 눌려 이마와 목덜미에 붙은 머리카락을 급하게 정리하고
초췌해 보이는 얼굴로 우릴 반기려 힘내서 웃는다.
아침부터 무표정이었던 엄마도 웃음으로 답한다.
엄마는 집에서 챙겨온 전기방석으로 누나 몸을 더 덥힌다.
그리고 부엌으로 달려가 새벽에 끓인 미역국에 다시 김을 낸다.
누나 앞에 놓인 노란 국물의 미역국, 맛있겠다며 웃으며 뜬 미역국.
한술 뜬 뒤, 코 한번 훔치고, 미역국이 싱거웠는지 눈물로 짠기를 더한다.
누나가 3개월 품은 그 아이의 태명은 "하트"였다.
그러나 태명이 무색할 만큼 작은 심장은 낮게 움직였고,
어느 날 멈춰버린 심장박동처럼 조용히 우릴 떠났다.
아이는 제 손가락 하나 만들지 못한 채 태초의 시작점에서 흩어졌다.
책상 위 두꺼운 약봉지 아래로 아기자기한 연분홍색 산모수첩이 깔려있다.
억지로 귀여운 글씨를 써가며 꾸민 산모수첩은 몇 장 써내려가지 못했다.
나는 일부러 수첩 끝까지 한장 한장 넘겼다. 그 아이가 채울 공간이었다.
다시 앞으로 돌아와 가만히 초음파 사진을 바라봤다.
아이는 무슨 사연이 있어 사진의 어두운 곳으로 숨었을까.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연분홍 산모수첩이 계속 떠올랐다.
다 쓰이지 못한 아기자기한 산모수첩,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 산모수첩
누나가 써내려간 연분홍의 그것은 미완성의 산모수첩이었을까
혹시 뱃속의 그 아이는 처음부터 딱 3개월만 신세 지기로 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여백 가득한 그 산모수첩을 완성이라 생각하기로 결론지었다.
그런 다음에야 조금 편한 시야로 운전할 수 있었다.
댓글목록
코스모스갤럭시님의 댓글

산모수첨 참 가슴아픈 사연이 수첩에 여울집니다.
태명이가 하트였다는 표현에서 얼마나 그 아기를 사랑했는지
누님되시는 분의 마음씨를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흔히 임신 3개월 이라는 말을 우리가 자주 하곤 하는데
괜히 3개월이라는 말이 있는게 아니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정신이 완성이라는 종결어로 마무리지어
보는 독자로 하여금 미소로 보게 하며
이 시가 누님께도 큰 위로가 되었으면 하네요.
절절한 사연 실감나게 그려낸 시, 따뜻함이 느껴집니다.
고나plm님의 댓글

애잔한 좋은 시 한 편 읽었군요
표현이 좋습니다
시상이 벽에 부딪힘이 없이 잘 낳은 것 같습니다
한참을 머무른 후 나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