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를 길들인 나의 사랑한 당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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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한 것. 단 한 번도 웃지 않는다.
저 부릅뜬 살기를 보라! "
사람 말 하는 법 잊을 정도로 짐승 같은 신음만 끙끙 앓고 묵묵히 걸어야 한 퇴근길이 있었소.
자유로운 새가 되려던 꿈과 노력을
비정한 송곳니의 결단으로 숨죽여 놓은 채
새가 날지 않는 밤에
더 일해야 지킬 수 있는 핏줄의 의무가 있었소.
이 핏빛은 그저 세상을
살기
위함이었소.
"음흉한 것. 숨기는 게 많은 늑대여.
과연 송곳니가 아니란 걸 증명할 수 있겠는가?
노리는 게 일확의 뒷목인 걸 다 알고 있다.
세상이란 이름에 복종하는 개 새끼, 편偏 '견'이 날 물어 뜯는다.
댓글목록
곽진구님의 댓글

점점 더 헤엄을 잘 치시는군요. 곧 날겠습니다. 여기 올 때마다 이 나무가 얼마나 자랐나 보는게 낙이군요. 우리집 앞 공터에 구지뽕 나무라는 하얀 이름표를 단 나무 녀석이 한 그루 있는데 전 그 나무에 물도 주지 않으면서 문득문득 그럽니다. 시는 시가 회초리를 치고 길을 안내하는 것 같습니다. 저 같은 맹이야 구제불능이지만 님 같은 재능과 젊음이면 언젠가 님의 시가 님을 데리고 가고 싶었던 절해고도에 당도할 것 같습니다. 독한 것이 되시길.
곽진구님의 댓글

잘은 모르지만 예술가에는 베르니니와 보르미니가 있고, 철새와 텃새가 있고, 유목민과 농경민이 있는듯 합니다. 화려하고 웅장한 베르니니는 모두가 꿈꾸지요. 그런데 자신만의 건축을 고수하다 죽은 보르미니의 어딘지 찡그린듯한 건축물에 오래 눈길이 머무는 까닭을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무엇이 시여야 한다. 어떤 시가 좋은 시고 어떤 시가 나쁜 시다, 어떤 시를 쓰야한다. 그런 기준과 생각들이 시를 죽이고 망치는 것 같습니다. 누가 신이 죽었다고 선언한들 신이 죽겠습니까? 살았던 적이 있는지도 모르는데, 시 역시 그러합니다. 시는 죽지도 않고, 실체도 잘 모릅니다. 안다한들 각자 정의가 다릅니다. 사람의 모습이 삶이 진실이 다양하듯, 시는 이래도 시고 저래도 시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게 시인 것 같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기준에 그 시가 맞지 않다고 해서 시를 살릴 필요도 죽었다고 죽일 필요도 없는 것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시체 같은 시를 쓰도 나는 살아 있는 시를 쓰면 되는 것이지, 내 시가 시체가 못 되어 시가 유통 되지 못한다고 세상 시가 죽었다고 말할 필요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냥 자유롭게, 삽이든지 의자든지. 늑대든지, 해바라기 든지 자신이 본대로 그려가는 것을 두고 고호는 미쳐서 해바라기를 비틀어 놓았고, 그들의 지문을 문제 삼을 까닭이 없는 것 같습니다. 시는 따뜻할 수도 있고 차가울 수도 있지만 따뜻해야 하는 것도 굳이 차가워야 하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더운 사람한테는 시원한 시가 읽힐 것이고 추운 사람에게는 따뜻한 시가 와 닿을 것입니다. 지구에는 많은 계절이 공존하고 많은 체온이 서로 살을 섞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포근하고 달짝지근한 일상이 지루해 죽겠는데 자꾸 미지근한 온기를 피워대면 그 시는 그에게 무용지물이고, 추워 죽겠는데 북극 남극 펭귄 이야기 늘어 놓으면 또한 짜증일 것입니다. 실컷 방황 한 자는 집을 그릴 것이고, 집만 지켰던 개는 늑대가 부럽겠죠. 아니면 방황의 피를 가진자는 더한 방황을, 집 지키는 개의 피를 가진 자는 더한 집을 그리기도 하겠지요. 무엇도 시가 아니고 무엇도 시인 것 같다고..ㅎㅎ 젊은 시인에게 말 한 번 걸어 봅니다. 건필 하십시요. 곱게 기집애처럼 다듬어져서 맥아리 없는 시들 많이 읽다가 젊음 혈관이 시퍼렇게 드러난 시를 읽으니 참 좋습니다. 그려.
곽진구님의 댓글

시가 팔리니 안팔리니, 시를 읽니 마니 개소리들 하지만, 시는 원래 대량 유통되는 상품성 있는 물건이 아니였고, 만약 시가 잘 팔리고 있다면 그때 시의 죽음은 오게 된 것이라고 진단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는 외로움과 가난의 업이라는 예술, 그 중에서도 가장 외로운 장르인 것 같습니다. 굳이 외로울려고 구석진 자리를 찾을 것도 아니지만 왜 이따군가 신경 쓸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시인에게도 성공이란게 있는 것인가, 유명이 성공인가? 여러 생각을 해보지만..그래도 어머니들은 신춘문예 당선 소감이나, 시집 프로필 따위를 오려서 지갑에 넣어 다니며 십원짜리 화투 치며 자식 자랑 졸라하는 이웃집 할머니에게 내 아들이라고 자랑하시고 싶겠죠. 그런 시인 되시거든.. 사인 부탁해요.
헤엄치는새님의 댓글의 댓글

나한테 토로 마라, 당신이 얼마나 괴로운지는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그 강가에서는 눈도 마주치지 말자는 시가 생각났어요.
고독은 누구도 싫어하는 것이라서 결국 쓰여지지 말았어야 했을 이런 비관에 기어코 글로 모양을 주었을 땐
마치 하얀 것에 검은 것으로 죄를 자백하는 거 같기도 해요.
그리고 죗값은 치러져야 하는 것이고요.
역설적이게도 저는 글을 쓰면서 동시에 그 누구도 공감치 않길 바래요.
완전한 무덤 속에서 그냥 나만 아는 흔적처럼 이 글이 유니코드의 유령이 되길 원하죠.
말씀하신 사인이라면 전 일단 구지뽕 나무보단 오래 살 거 같습니다.
어지간한 나무는 500년쯤 살지 않을까 싶은 걸요.
곽진구님의 댓글

혹시..젊은 시인님! 제 댓글에 마음이 상하신건 아니신지요?
늙은 사람이 간 밤 술이 덜 깨어, 사설이 길어서 미안합니다.
님의 시가 현재 어떻다는게 아니고, 다양한 시가 시로서 포용 되어져야 한다는..
죄가 뭔지는 잘 모르지만..글고 장년의 시는 완성도를 읽지만
님의 말처럼 26세의 시는 가능성으로서 읽혀야 하고
걍 평범한 시인보다 자기 무늬 자기 세계를 가진 특별한 시인이 되길 바랬고..
제가 시를 잘모르고 시를 쓰다보니 이런저런 흉내만 내다 제 시를 쓰지 못했다는
자각과 반성 땜에...감히 충고 같은 걸 했다면 사과 드림...
걍 그리 생각한다고..요..에구 무서버라..간 안 빼물께요...
헤엄치는새님의 댓글의 댓글

저도 모르게 좀 삐딱스럽게 말했나 봐요.
사실 슬픔 분노 같은 거 죄다 섞어 놓은 감정 쓰레기통 같은 이런 글은
누구든지 읽고 싶지 않은 기분일 텐데 싶었어요.
누구든지 피하고픈 주제로 혼자 일기장에 써야할 법한 멍청히 구는 옹알이를 기어코 적었으니
죗값이란 건 유령 대접받는 모두의 무관심이라 할지라도 저한텐 할 말이 없는 걸요.
만약 아름다운 시를 적게 되면서 말씀하신 "시인의 사인"이란 게 생기기엔
저는 500년이 지나도 안 될 거 같다고 생각했어요.
뇌 어디에 나사가 빠진 건지도 모르겠어요.
전 천사의 하프 소리 같은 아름다운 시학을 갖기보단
지옥의 극작가가 되고 싶다고 바랬거든용...
곽진구님의 댓글

시가 배설이여서는 않될 이유라도 있는지?
배설하지 못하는 생명체는 죽음..
몇 년 전 인터넷 기사로 읽었는데 밍크 쥐인지 하는 것을 쥐의 털을 얻을 것이라고 외국에서
사들였다가 쥐 밍크를 많이 입지 않았는지 개체수가 불어서
이제는 그 쥐를 죽여야 할 판이 되니까 갖은 연구를 하다 새끼를 낳은 어미의
항문을 묶어 버리는 방법을 선택했데요.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만)그랬더니 스트레스를 받은
어미쥐가 새끼를 잡아 먹어버리게 만드는 방법으로 개체수를 줄이기로 했다고...
영혼도 배설이 필요한 것 같다코 무시칸, 저는 생각함요.
글고 습작이란 과정인데
처음 쌀 씻을때 짙은 뜨물이 나오는 것처럼 이런 과정 거쳐 밥 앉힐 수 있는
맑은 물이 되는것 같기도 하욤요...지옥의 극작가...ㅎㅎ 진짜 필요한 것 같아욤.
이곳도 지옥이니까.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