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딱 다 벗고 있는 부처가 나를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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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딱 다 벗고 있는 부처가 나를 덮쳤다
법명法名/ 덕산德山
법호法號/ 탄무誕无
죽으나 사나 화두話頭만 그리며
화두로서 나를 죽으라 죽이다가
그만 내가 내 허虛를 찔렀다
내가 내 허를 찔렀는데
암중모색暗中摸索에 마침표를 찍고
삼라만상의 모든 허虛를 찌르고 말았다
무한한 과거에서 무한한 미래에까지,
삼세三世의 주인이며
만법萬法의 왕 사생자부四生慈父의 허를,
홀딱 벗고 있던 부처의 몸매가 나를 덮쳤다
내 몸속으로 부처의 물기가 들어왔다
온 천지天地가 커다란 나(부처)의 사원寺院이며
온 대지大地가 나(부처)의 도량道場
모든 만물에게 차별 없이
두루 편재遍在해 있으며
가장 멀리 있는 은하銀河에도 있고,
일찍이 생긴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어서
처음이 없고 종말終末이 온대도 그 끝이 없다
석가와 예수가 오기 전부터 뚜렷이 밝았고,
크고, 넓고, 멀며,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으며,
귀신도 엿볼 수 없고,
높고 또 높아 신령神靈하여
천상천하에 짝할 자가 없다
상상과 허구는
온데간데없이 자멸自滅하였고,
시간과 공간과 마찰 없는 영원을
차별 없이 모자람 없이 그리고
나고 죽음이 없는 천상세계와
텅 빈 공空을 장착해 시중무문示衆無門 펼친다
여기 둘이 있을 수 없다
하나뿐
유有, 공空 어느 쪽에도 치우침이 없는
영원불멸永遠不滅로서
텅 빔마저 없는 텅 빈 그 하나.
형상 없는 곳에서 형상을 보며
소리 없는 곳에서 소리를 듣는다
**
*
* 화두話頭/ 선가禪家(깨침의 세계)에서 사용하는 화두라는 말은
/ 세간법에서 말하는 이야기의 말머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 깨쳐야 바르게 알 수 있는 공안公案(조사선, 조사관)입니다.
/ 깨치게 되면 바르게 알게 됩니다,
/ 세상 모든 만물은 모두 화두(공안公案)가 될 수 있습니다.
* 허虛/ 부처의 본체.
/ 공空이라 표현하기도 하고,
/ 무無라 표현하기도 합니다.
* 나/ 부처.
* 부처/ 인간의 본래 성품, 모든 만물의 본래 성품.
* 삼세三世/ 과거, 현재, 미래.
* 삼라만상의 모든 허虛를 찌르고 말았다/ 삼라만상의 본래 성품이 모두 공함을 보았다.
/ 모든 만물의 본래 성품의 본체는 공空이고, 허虛이며, 무無입니다.
/ 온몸으로 부처를 만나 부처와 계합되었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 사생四生/ 습생, 난생, 태생, 화생(濕生,卵生,胎生,化生)입니다.
/ 모든 만물은 이 사생 가운데 한가지로 태어납니다.
* 사생자부四生慈父 /
/ 육도사생, 일체생령의 자비스러운 아버지라는 뜻으로
/ 모든 만물의 본래 부모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 모든 만물의 본래 부모, 본래 고향은 부처입니다.
/ 일체중생을 자비심으로 제도하는 부처의 작용(묘용妙用)을 가리킵니다.
* 홀딱 벗고 있던 부처가 나를 덮쳤다.
/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텅 빈 공空(허虛, 무無)이 부처의 본체本體입니다.
/ 아무것도 없는 부처의 본체, 텅 빈 공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 부처를 만나 부처와 계합된 상태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 유有, 공空 어느 쪽에도 치우침이 없는/
/ 중도中道를 가리킵니다.
/ 부처의 본체와 부처의 성품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 부처의 본체와 부처의 성품과 작용이 중도中道입니다.
* 제가 주해註解를 달아 드리는 것을
시의 설명을 해 드리는 것으로 착각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되면 큰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시적 견해로 읽으시면 안 됩니다.
시적 견해로는 알 수 없는 부처에 대한 노래입니다.
제 노래는 실존하는 사실, 깨침(인간의 본래 성품, 부처)에
바탕을 둔 선시禪詩(오도송悟道頌)입니다.
평역을 해 드리고,
주해註解를 달아 드리는 것은 무문관無門關 강의입니다..
댓글목록
탄무誕无님의 댓글

*
큰스님이나 종단의 품계 높은 사람들을 깨친 선지식善知識(선사禪師)이라 착각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말은 어떤 말이든지 다 옳다고 생각하고 전전긍긍하면서
감히 비판할 생각을 하지 못한다.
참으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마치 한 사람의 맹인이 많은 맹인을 이끌고 위험한 길을 가는 격이다.
악지식惡知識을 비판하고 꾸짖을 수 있어야 비로소 불조의 은혜를 갚을 수 있다.
자신의 확실한 소신이 있는 자라면
정법을 위해서 큰스님도 비판하고 도인도 꾸짖을 수 있어야 한다.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보다 차라리 그것이 위하는 길이다.
천 원짜리 물건 하나 사면서도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살피면서
지금 생각하고 있는 그것이 진짜 나인지?, 가짜 나인지? 살피지 않을 참인가.
수천만 불조佛祖가 한꺼번에 나에게 와서 질문하고
법거량法擧揚 하자 해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다.
*
탄무誕无님의 댓글

*
주해註解를 달아 드린 곳에서
중도中道란 말이 이왕 나왔으니
무문관無門關 강의를 좀 더 해드리겠습니다.
* 나 탄무誕无는 말한다.
일체법이 공空이기 때문에 연기緣起이다.
모양 있는 것이든, 모양 없는 것이든,
유정有情이든, 무정無情이든
어떤 작은 물질도 홀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서로 의지하고 의존하여 서로 관계를 맺는다.
너의 조건이고, 나의 조건이며,
너와 나는 또 다른 사람의 조건이며,
또 다른 그 무엇은 너의 조건이며, 나의 조건이다.
너와 나는 또 다른 그 무엇의 조건이다.
모든 원인과 그 원인을 돕는 조건들도 하나같이 실체가 없으므로 공이다.
그러므로 연기는 곧 여래如來의 작용이고, 여래는 곧 공이다.
연기이면서 공이요, 공이면서 연기인 모든 존재의 원리가 중도다.
이 중도가 부처(여래)의 본체 공이며, 부처의 성품이며, 부처의 작용이다.
쌍차쌍조雙遮雙照, 쌍민쌍존雙泯雙存이다.
즉 유무, 선악의 상대적 견해를 함께 부정하고 상대적 견해를 함께 긍정하며,
상대적 양면을 함께 수용하고,
모든 상황과 모든 장애와 모든 경계,
모든 긍정과 모든 부정이 함께 공존하고 있는 그것이 중도(공, 무, 허)다.
모든 경전과 어록들은 이 중도中道(공, 무, 허)로 설해져 있다.
이 부처표 공空은 관념적인 것이 아니다.
체험을 통해야 확인할 수 있는 실재이다.
*
탄무誕无님의 댓글

*
/ 귀신도 엿볼 수 없고,
/ 높고 또 높아 신령神靈하여
/ 천상천하에 짝할 자가 없다
* 이 말을 나 탄무誕无가 평역해드리겠다.
우리가 참으로 깨쳐 증지證智(부처)를 체득하게 되면
어째서 '천상천하에 짝할 자가 없고' / '항상 홀로 다니고 홀로 걷느냐?' 하면,
깨친 경계(경지)에서는 부처와 부처가 서로 보지 못하고,
조사와 조사가 서로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佛佛이 不相見이요, 祖祖가 不相逢이다. (불불이 불상견이요, 조조가 불상봉이다.)
왜냐하면 여기는 일체의 명상名相(이름과 모양)이 다 떨어져 나간 공이기 때문이다.
천상천하에 오직 나 혼자 높아서 천하를 횡행하고 허공 위를 혼자 걸어가는 것이다.
의식이 일체 걸림 없는 공 위를 홀로 활보하며 걷게 된다.
아무 짝도 없고 걸림도 없이 자기 혼자 노닐게 되므로 서로서로 반려伴侶가 없다.
반려가(짝이) 없다는 것은 상대가 없는 절대적 공이며,
또한, 모든 명상(이름과 모양, 형상)의 양변이
다 떨어져 나간 아무것도 없는 공이고, 무다.
아무것도 없지만 모든 만물을 다 포섭하고 있는 공이다.
선가禪家의 선사禪師들은
/ 천상천하에 짝할 자가 없다/는 이 말을 이렇게도 표현한다.
/ 각자의 삼매三昧는 남이 알지 못한다.
또 이렇게도 표현한다.
/ 나로(부처로) 말미암아 문자를 밝힐 수는 있어도
/ 문자로는 나를(부처를) 밝힐 수 없다.
.
탄무誕无님의 댓글

*
사람들이 많이 오는 것보다 부처를 바르게 지도하고
바른 안목을 가진 자가 나와야 한다.
안목 없이는 깨친 자를 바르게 바로 볼 수 없다.
깨침에는 안목이 근본인데
총림의 방장(조실)이라도
모두 안목이 투철하다고 볼 수 없는 것이 한국 선가禪家(선방禪房)의 현실이다.
절이 크다고 해서 깨친 선지식善知識이 사는 곳이 아니다.
결제 있고, 해제 있고, 하안거, 동안거 있으면 깨치지 못해!
결제, 해제, 안거 없이 쉼 없이 화두를 몰아붙이며 몰두해야 해,
그래야 깨칠 수 있어.
*
탄무誕无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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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리는 강의,
재미없는 강의,
안 기다려지는 강의,
틀에 갇힌 뻔한 강의,
지식만 달달 외운 강의,
시계 자꾸 보게 하는 강의,
집중을 못 시켜드리는 강의,
학생보다 스승이 공부를 덜 해온 강의,
스승이 영 옳잖아 말을 빙빙 돌려서 하는 강의,
다 알면 제도할 게 없다고 다 안 가르쳐주는 강의,
다 가르쳐주면 더는 사기 칠 수 없다고 따라오게만 하는 강의,
이 모두는 죄악이다.
어떤 강의든(가르침이든),
강의는(가르침은) 스승을 뛰어넘도록 바르게 가르쳐주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