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시禪詩를 읽을 때는 공空에 마음을 두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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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시를 읽을 때는 공에 마음을 두어라
법명法名/ 덕산德山
법호法號/ 탄무誕无
마음은 잡생각으로 똘똘 무장한 채
날마다 밤마다 머리 위로 올라가
단단히 경계 서는 것을 좋아하지만,
부처는 무장되어 있지 않다
경계를 서도 공空으로 서고
무장되어 있다 해도 무無가 무장이다
공이지만 유형有形과 무형無形을
다 갖추고 있는 공.
모든 산과 강,
땅덩이와 초목의 우거진 숲과
온갖 물건과 만물의 모든 현상現象,
깨끗하고 더러운 모든 법이 다 여기서 나온다
고금불조古今佛祖가 다 같이 공부한 것도
이 공을 공부한 것이요,
석가와 예수가 다 같이 깨친 것도
이 공을 깨친 것이며,
모든 경經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도
이 공을 설명한 것이며,
일체중생이 미혹迷惑한 것도
이 공에 미혹한 것이며,
모든 조사祖師가 서로 전한 것도
이 공을 전한 것이다
이 공을 밝게 알면 일마다 다 이것이요
가는 곳마다 온전히 드러날 것이며,
이 공에 미迷하면 하는 생각마다 뒤바뀌고
생각은 늘 코에 걸린 코뚜레가 된다
선사禪師의 선시禪詩를 처음 접하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쉽게 접하는 사람도
반드시 먼저 이 공을 알아야 한다
부디, 바르게 알아야 한다
이 공을 바르게 알지 못하면
무명초는 계속 자라고,
체험이 없으면 삿된 견해만 더욱 자란다
체험을 통해야
선시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부처표 공이다
*
***
* 선시禪詩/ 오도송悟道頌(게송 또한 오도송입니다)이라고도 합니다.
/ 선시라 함은 마음 행위를 노래한 것이 아닙니다.
/ 깨침을 바탕으로 하는 시를 가리킵니다.
/ 마음 행위로는 선시를 노래할 수 없습니다.
/ 마음 행위로는 선시를 노래 부를 수 없습니다.
/ 마음 행위로는 죽어도 선시가 나오질 않습니다.
/ 마음 행위로는 죽어도 깨칠 수 없다는 말입니다.
/ 깨치고 나야 마음 행위가 부처의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 깨치기 전에는 즉심시불卽心是佛이 될 수 없습니다.
/ 즉심시불이라는 말은 깨친 자에게 맞는 말입니다.
/ 깨치고 보면 마음도 부처인 것입니다.
/ 마음 행위에 늘 부처가 함께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그래서 즉심시불이라는 말이 생긴 것입니다.
/ 선시는 부처의 본체本體, 공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 선시는 인간의 본래 성품, 부처를 노래한 것입니다.
/ 부처의 성품과 작용, 생生과 사死와 공空을 노래합니다.
/ 작용에는 향하向下의 진리(세속의 도리)도 있습니다.
/ 깨침의 세계를 노래한 것이 선시입니다.
* 공空/ 허虛 또는 무無라고도 표현합니다.
/ 부처의 본체本體입니다.
* 부처/ 인간의 본래 성품.
* 선사禪師/ 나, 선각先覺, 깨친 자,
부처와 계합한 자, 살아 있는 부처. .
댓글목록
화암님의 댓글

공을 깨치다. 앎과 체험...알듯 모를듯, 탁한 머리로는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스님의 깨침은 80입니다. 민초는 20 이지요. 머잖은 날에 100을 기대합니다...() 성불 하시기를 바랍니다!!
탄무誕无님의 댓글

*
그대의 마음 행위가 지금 어떤지 아십니까?
스님 아닌 사람에게 스님이라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만 봐도 모든 것을 마음 행위로 추측해서
그대만의 잣대와 기준을 갖고 들어왔음이 분명하지요.
공을 깨치다/는 것은 표현을 이렇게 하는 것이지,
몸과 마음과 의식이 모두 공에 계합한 상태를 말합니다.
지식의 차원이 아닙니다.
생각의 차원이 아닙니다.
마음 행위가 아닙니다.
발견이며, 체험의 영역입니다.
체험으로서 계합을 해야 하는 영역입니다.
무슨 깨침에 80이 있고, 90이 있고, 100이 있습니까?
깨침에는 80도 없고, 90도 없고, 100도 없습니다.
깨치면 공입니다.
체험을 통해 공에 계합하지 못하면 깨침은 없습니다.
공에 계합하지 않은 것은 깨침이 아닙니다.
확철대오가 아닙니다.
깨침에도 깊이가 있습니다.
깨치면 단박에 깨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돈오돈수頓悟頓修라 합니다.
.
탄무誕无님의 댓글

*
글을 깊이 있게 천천히 여러 번 읽으십시오.
그게 댓글을 달기 전에 글에 대한 예의입니다.
댓글을 달고 싶으면 그냥 평범한 인사를 주십시오.
물 흐리게 하지 말고요.
그대의 행위를 아무 말 없이 부처는 지켜보고 있습니다.
인가印可는 사문도창沙門道窓으로부터 2008년에 벌써 받았습니다.
중생인 그대에게 또 인가를 받아야 합니까?
중생 짓 잘하는 인가를 받을까요?
중생 짓에는 50도 안 되는 것에서부터
80도 있고, 90도 있고, 100도 있고,
100 넘는 놈도 있습니다.
모른다면서 할 얘기 다 해놓았군요.
모르면서 아는 척하지 마시고, 물으십시오.
묻기 싫으면 그냥 가만히 계십시오.
/그대는 다시 말을 부려 변소에 단청丹靑을 했습니다./
몸으로 짓는 신업身業,
말로 짓는 구업口業,
생각으로 짓는 의업意業,
이 죄를 자꾸 짓지 마십시오.
.
화암님의 댓글

말씀을 좋아 하시는군요. 부럽습니다.
스님이 아니셨군요. 스님 아니라는 말씀도 스님이라는 말씀도 없군요.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탄무誕无님의 댓글

.
예전에 이미 스님이 아니라는 것을 밝혔습니다.
주해註解를 달아 드린 댓글에서 상세히 밝혔습니다.
스님이라는 말의 유래와 뜻도 바르게 가르쳐 드렸습니다.
글 한 편만 읽고 댓글 달려고 하지 마시고,
댓글 달고 싶으면 지나간 글도 읽어보고 들어오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제 글을 읽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지나쳐 가십시오.
그대도 나의 글을 쳐다보지 않고,
나도 그대 글을 쳐다보지 않고 살아가면 됩니다.
복잡할 거 하나도 없습니다.
아주 쉽습니다.
왜 쉬운 길, 아는 길 놔두고 어렵게 가시려 합니까?
그대 팔뚝 그대가 흔들고, 내 팔뚝 내가 흔들면 됩니다.
서로에게 어떠한 관심도 보일 필요가 없습니다.
.
탄무誕无님의 댓글

*
말씀을 좋아한다???
비아냥거리는 이러한 잣대를 들이대지 마십시오.
그대의 생각과 말은 꽈배기처럼 많이 꼬여 있습니다.
꽈배기입니까?
얼마나 더 큰 죄와 잘못을 짓고 싶어 그러십니까?
자꾸 잣대와 기준을 갖고 들어오십니다.
부러우면 죽으라 공부하십시오.
댓글에 신경 쓸 시간에 죽도록 공부하십시오.
나만큼 공부하십시오.
목숨 떼놓고 공부하십시오.
토론은 그대가 깨친 뒤에 그때 합시다.
나는 그대처럼 말이 많지 않습니다.
하루 한마디도 안 하고 살 때가 더 많습니다.
이 습(習, 濕)이 든 지 십 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봇물 터지듯 글로 나오는 것입니다.
침묵이 편합니다.
7년 전前(햇수로 8년째)부터
언로言路는 오직 시마을만을 향해 열어놓고 있습니다.
시마을로 오기 이전에는
연인사에서 무문관無門關 강의를 할 때
그곳을 향해서만 언로를 열어두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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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까지 올려놓은 모든 노래는 모두 오도송悟道頌이며,
/ 주해註解를 달아 친절親切이 설명해 드리고 있는 것은 무문관 강의입니다.
/ 어떠한 명예와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습니다.
/ 그 어떤 선사禪師에게서도 나올 수 없는 듣도 보도 못할,
/ 부처의 살림살이를 공空으로 내어 드리고 있습니다.
줏대와 고집은 분명 다릅니다.
쉿!
이제 그 고집 멈추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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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무誕无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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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나만 박살나면 도량청정 ★★★
★★★ 하나면 비로자나 조아리고 ★★★
★★★ 하나로 생사해탈 노래하니 ★★★
★★★ 하나에 석가탑이 싱글벙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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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의 선시가 매끄럽지 않아 1연/
* 1행, 2행, 3행, 7행, 11행에
* 언어를 교체 투입시켜 정리, 정돈하였습니다.
* 그리고 3연 종반부에서 흐름을 연착시키는
* 언어를 탈락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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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암님의 댓글

아무튼 늘 건강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탄무誕无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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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손 합장하여 예를 갖춥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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