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행위로는 어떠한 대답도 깨침을 바르게 표현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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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행위로는 어떠한 대답도 깨침을 바르게 표현하지 못한다
법명法名/ 덕산德山
법호法號/ 탄무誕无
언어만을 향해 달려와 미끼를 무는 순간,
죽은 목숨이다
부처의 문중門中 사람이 되었는가를 따져야지,
생물학적 나이는 깨침의 세계에서는 중요하지 않다
인간의 삶은 아상我想을 자기 자신으로
알고 있는 마음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부처의 본체本體, 공空에서 일어나는 기연機緣에 의해
자비와 도움으로 살아간다
나는 부처표 공을 통해 커다란 위안과 심신心身의 평화를 얻는다
이 가피加被는 이만저만한 은혜가 아니다
12시 5분 전前은 없다
정각正覺만 다 설說하기도 모자랄 지경,
본래 인간은 오분悟分 전前, 오분悟分 후後가 없는
삼삼三三한 정각正覺
그러하므로 정각을 발견하는 일은
인간의 몫이다
선문답禪問答(조사관祖師關)은
코미디나 말장난이 결코 아니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가장 진지한 물음이고,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가 무너져도
영원히 죽지 않는 인간의 본래 성품에 대한 대답
언어와 논리, 마음 행위로는 절대 답이 나올 수 없다
단하(단하선사丹霞禪師)가 춥다고 불상佛像을 아궁이에 처넣었다
깨치고 나면 실속 없는 겉모양의 창시자(불상)는 아궁이 속으로.
구경究境은 멀리 있지 않다
인간 내부에 있다
뜰 앞에 잣나무를 다시 보게 되는 날,
바로 살아 있는 예수가 되고 석가가 되는 때
그 어떤 선사禪師보다 정법正法에 투철한 사람이 된다
“고금불조古今佛祖들이 설한 정법도 별것 아니구먼.” 하고
서슬 퍼런 출격出格 대장부大丈夫 되어
콧바람을 당당히 내뿜을 것이다
**
*
* 아상我相/ 몸과 마음이 자기 자신의 본래 모습인 줄 알고
몸과 마음에 모든 걸 집착執着하는 행위.
* 부처/ 인간의 본래 성품.
* 나/ 선사禪師, 선지식善知識.
* 삼삼三三한/ '전삼삼前三三, 후삼삼後三三'이라는
유명한 조사선祖師禪을 줄인 말,
이 말은 태어나기 전에도 삼삼이었고,
죽은 후에도 삼삼이다.
태어나기 전이나 죽은 후에도 같고 같다는 뜻입니다.
부처(부처의 본쳬, 여래선如來禪)를 가리킵니다.
* 선문답禪問答(조사관祖師關)/ 조사선祖師禪이라고도 함.
* 뜰 앞에 잣나무를 다시 보게 되는 날/ 이 선문답에는 깨친 후,
/ 깨침의 세계가 일상日常으로 돌아와 평상심平常心과
/ 반드시 다시 계합契合되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 귀거래사歸去來辭와 반드시 다시 계합되어야 합니다.
/ 그렇게 되어야 바른 깨침입니다.
/ 그래야 부처를 바탕으로 한 향하向下의 진리를 설할 수 있습니다.
/ 이 선문답(조사관)은 향하의 진리, 평상심을 설한 법어입니다.
* 예수가 되고 석가가 되고/ 예수가 석가고, 석가가 예수입니다.
깨침의 세계에서는 예수와 석가(부처)를
서로 다른 한 개인으로 지칭할 수 없습니다.
예수와 석가라는 말은 깨친 선각先覺(깨침)을 가리킵니다.
* 출격出格/ 일정(一定)한 격식(格式, 틀)을 벗어나 있음.
즉,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부처의 본체本體,
공空의 작용으로 그래서 나타나게 되는 부처의 묘지력妙智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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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탄무誕无님의 댓글

*
하루는 단하천연丹霞天然 선사께서 행각을 하실 때 암자에서 쉬어 가는데 때가 겨울철이라,
방이 추워서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으셨다.
그래서 법당에 모신 목불木佛을 도끼로 패서 군불을 때시었다.
암주庵主가 새벽에 일어나 예불을 드리려고 보니 부처님이 안 계시므로,
‘이 어찌 된 일인고?’하고 도량을 찾아보았다.
그러다가 부엌 아궁이 속에서 불타고 있는 부처님을 보고는,
객실 문을 열어젖히고 호통을 쳤다.
“이런 무례한이 어디에 있는가?”
“어째서 무례한인가?”
“부처님을 패서 불을 때니 무례한 아닌가?”
“나는 불을 때서 사리를 얻으려 함이었다.”
“어찌 목불에서 사리가 나온단 말인가?”
“그럼 진불眞佛이 아니지.”
그런 후에 암주가 눈썹이 다 빠져버렸다.
여기 모인 모든 대중은 알겠느냐?
목불을 패서 군불을 땐 이는 눈썹이 빠지지 않고,
왜 암주가 눈썹이 빠졌느냐?
〔양구良久하시다가 대중이 말이 없으니, 진제 대선사(현 제13대 조계종 대종정)께서 스스로 답하여 이르시기를,〕
禍福無門이나 有人自召<화복무문 유인자소>로다.
화와 복은 들어오는 문이 없음이나
사람이 스스로 부름이로다.
기묘년 하안거 동화사 금당선원 진제 대선사의 해제 법어(인간의 본래 성품에 대한 말씀, 2543.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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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무誕无님의 댓글

*
고금불조古今佛祖들은 말했다.
/말 있음도 묻지 않고, 말 없음도 묻지 않겠다./
이게 물음의 전부다.
신기한 화법이다.
나, 탄무誕无에게는 하나도 신기할 게 없다.
나 탄무誕无는 말한다.
주어가 생략되었다,
주어는 '마음 행위'이다.
마음 행위의 말 있음도 묻지 않고,
마음 행위의 말 없음도 묻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러한 화법은 선가어록禪家語錄(조사록祖師錄)에 자주 등장한다.
/일러도 삼십 방(道得也三十棒), 이르지 못해도 삼십 방(道不得也三十棒)이다./
여기서도 주어는 생략되었다
주어는 '마음 행위'이다.
'마음 행위로 일러도 삼십 방, 마음 행위로(부처에 대해) 이르지 못해도 삼십 방이다.'
부처(인간의 본래 성품)에 대한 질문에
마음 행위로(마음의 농간으로) 답하는 순간,
죽은 목숨이다.
이러한 질문은 모두,
지금 부처와 계합契合되어 있는가를 묻고 있는 질문이다.
눈부신 조사선祖師禪(조사관祖師關)이다.
오직 부처표 공空, 향상向上의 진리와 부처의 작용과
부처를 바탕에 두고 향하向下의 진리로 대답하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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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선님의 댓글

올려주신, 귀한 시를 읽으며...
결국, 행동 없는 마음 행위라는 건 공허하다는 걸 느낍니다
행동으로 부처님 말씀을 실천하지도 않고 그저 제 깨달음인 양, 사람들의 귀를 현혹시키는
수행자들의 연꽃은 어딘가 모르게 티가 납니다
(특히, 사찰이나 TV에서 기백만원 짜리 장삼가사 걸치고 설법하는 유명 중님들.. ARS 시주는 빠짐없이 꼭 당부하는)
중생고 苦(가진 거 없고,몸 아프고, 배 고프고, 몸 뉘일 곳 하나 없는)이라는 生의 진흙탕을 몸소 경험하지도 않고
그저 화사하게 핀 연꽃만을 통해 <한 깨달음>이 어쩌니 저쩌니.. 드높은 좌대 座臺에
마치 지가 부처님인 양 퍼질러 앉아, 폼 나게 건방을 떱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나불대는 주둥이를 통해 마음으로만 뇌까리지 말고
(요즘의 대다수 기름진 중님들처럼 - 물론, 다 그런 건 아니지만 - 진짜 목숨 걸고 수행하는 참스님네들도 계시기에)
살아있는 행동으로서의 <실천하는 육바라밀 六波羅蜜>을 말하신듯 합니다
좋은 시, 감사드립니다
늘 건강에 保重하시옵고, 건필하소서 - (맨날 각종 라면이나, 2500원짜리 국수만 드시지 말고)
탄무 시인님,
탄무誕无님의 댓글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대구는 어제부터 비가 내렸다, 지금 그쳤습니다.
이런! 가늘게 또 오는 거 같습니다.
부엌엔 여러 군데서 줄줄 새고, 비가 오면 방이 눅눅해집니다.
머리 면도 깨끗이 하고, 세수를 마치고 자리에 앉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