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기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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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크신 아버지의 억센 손에 꼬뚜레를 한 어진 황소가
여름내내 잎 연한 풀을 뜯고,
숨에 차오르는 뜨거운 바람에도
억새풀 독새풀 푸르도록 대지를 식히는 여름
픽기풀이 있어 좋았지.
꽃게의 속살 뽀얗게 찰진 어린이삭이
주먹에 채워질 때까지 모아 먹었던,
잔칫집 품앗이 간 어머니의 쌈지속 찰떡내 나는
픽기로 핏기를 채우던 걱정 없던 때가 좋았지.
썩은 속 자식 키운 한평생 빈거죽만 남은 어머니와
속을 다 뽑히고도 가뭄진 여름 픽기풀 헐벗은 몸에
살짝 소름이 돋는 선선한 가을이 오면
마른 잔디 깔끄러운 언덕배기에 바람이 일어
픽기풀꽃 홀씨 하늘 가득 허공을 나르고
철없이 신난 여치 메뚜기 벼줄기에 꿰어
종일 배를 채운 순한 황소의 고삐를 잡고
굵은 이삭 바람에 출렁이는 논두렁 밭두렁 가로질러
햇살 붉은 황혼이 금방 어두워질 저녁 등을 떠밀어도
하나 바쁠 것 없이 고향집마당 느릿하게 문을 열었지.
행여 그 옛날 그 자리에 그대로일까 배고픈 마음
봄마다 여름마다 고향언덕자리 픽기풀이삭을 찾지만
세상사 쩔은 희미한 눈으로는 이제 찾을 수 없네.
수십년 무심히 잊고 지냈던 서러운 동무
토라진 마음 꽁꽁 숨긴 채 고개 돌리고 숨었던 게지.
(*픽기풀:학명은 '띠'라 하고 어린 이삭은 지방에 따라 일반적으로는 '삘기'라 하고 경상도에서는 '픽기'라고도 하는데 뽑아 먹으면 쫄깃하게 단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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