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나 한잔 들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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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나 한잔 들게나!
법명法名/ 덕산德山
법호法號/ 탄무誕无
길路이 곧 길道
왜 여기서 하지 않고 멀리 가서 하려고 해?
멀리 가면 편할 거 같지
가봤자
거기엔 또 새로운 장애와 엄청난 경계가 기다리고 있어
장애와 걸림 없는 곳은 없거든
멀리 가려 함은 숨으려는 의도잖아
숨어도 여기서 숨어
해도 여기서 해
끝장내도 여기서 끝장내!
깨침의 세계에서는
석가와 스승마저도
자유를 방해하는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일 뿐이다
존경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
'차나 한잔 하게나!(喫茶去)'
이 말의 궁극적인 뜻을 안다면
천하를 짓밟으며
소풍 가듯 즐기는 길路
마음 놓고 가는 길道
*
*****
* 마음 놓고/ 마음 내려놓고,
나의 본래 모습 부처만 보고.
마음으로 마음을 비울 수 없습니다.
마음으로 마음을 내려놓을 수 없습니다.
비웠다 해도 마음이고,
내려놓았다 해도 그건 마음입니다.
부처와 계합契合하면 마음은 자연적으로
비워지고 내려집니다.
왜냐하면,
부처의 본체本體가 공空이므로 그렇습니다.
.
댓글목록
탄무誕无님의 댓글

*
참된 원리는 앉거나 누움에 있지 않습니다.
부처(궁극)의 자리는 일정한 틀이 없습니다.
좌선坐禪은 절차입니다.
좌선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좌선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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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무誕无님의 댓글

*
"내가 좌선을 얼마만큼 했네"
"내가 좌선을 몇 년 했는데" 하는 것은
좌선에 목적을 두는 공부입니다.
깨침은 좌선의 자세에 있지 않습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
화두話頭를 놓치지 않고 또렷이 새긴다면
그것이 정말 알짜 베기 진짜 좌선입니다.
바른 공부입니다.
바른 간화선看話禪입니다.
*
*
*
/ 깨침은 좌선坐禪에 있지 않다 /
몸의 자세로 깨치는 게 아니다
의식을 한 자세로 해야 깨친다
.
탄무誕无님의 댓글

*
조주趙州 선사禪師가 어떤 수좌에게 물으시되,
“일찍이 여기에 이르렀느냐?” 하시니,
수좌가 대답하되,
“일찍이 이르렀습니다.” 하니,
조주가 말씀하시되,
"喫茶去끽다거!"
"차나 한잔 마셔라." 했다.
또 한 수좌에게 물으시되,
“일찍이 여기에 이르렀느냐?” 하시니,
수좌가 대답하되,
“일찍이 이르지 못했습니다.” 하니,
선사께서 말씀하시되,
“차나 한잔 마셔라.” 하시었다.
이에 원주院主가 묻기를,
“어찌하여 일찍이 이르렀던 이도 차나 한잔 마셔라” 하고,
“일찍이 이르지 못했던 이에게도 차나 한잔 마셔라” 하십니까?” 하니,
선사께서
“원주야!” 하고 부르시니,
원주가 “예” 하고 대답하거늘,
“너도 차나 한잔 마셔라.” 하시었다.
*
*
이에 산승(山僧, 현 조계종 대종정 진제 대선사)이 대중에게 묻노니,
시회대중時會大衆은 조주 선사를 알겠느냐?
양구良久(잠시 살펴보다)하시다가 대중이 말이 없으니,
스스로 점검하여
진제 대선사(현 13대 조계종 대종정)께서 이르시기를,
일찍이 이르렀다 해도 “차나 한잔 마셔라” 하고,
일찍이 이르지 못했다 해도 “차나 한잔 마셔라” 하니,
조주 선사의 법은 사의思議하기 어렵도다.
필경에 어떠한고?
조주 선사의 안광眼光이 항사법계恒沙法界를 비추어 빛남이라.
비록 이와 같으나,
“시자侍者야!”
“차를 달여와서 조주 선사께 올려라.”
“할喝!”
일할一喝 하시고 진제 대선사께서 하좌下座하시었다.
.
탄무誕无님의 댓글

*
조주 선사가 자신을 찾아오는 학인學人을 보고 물었다.
"그대는 이곳에 와 본 적이 있는가?"
"처음입니다."
"차나 한잔 하게나!"
조주 선사는 또 다른 학인을 보고 물었다.
"그대는 이곳을 와 본 적이 있는가?"
"예, 전에 왔었습니다."
"차나 한잔 하게나!"
이때 원주院主가 물었다.
"선사께서는 어째서 이곳에 왔던 사람이나
처음 온 사람에게도 차나 한잔 하라고 하십니까?"
"원주야!"
"예"
"자네도 차나 한잔 하게나!"
.
레르님의 댓글

"차나 한잔 하게나"
노자 중용을 읽고 선사의 얘기를 듣는 순간
"이게 이것구나"라며 그 날 무지막지 술을 먹었던 생각이 납니다
...ㅎㅎ...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건강하세요
탄무誕无님의 댓글의 댓글

자리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짜 공부를 하십시오.
열심히 하십시오.
건강 잘 챙기십시오.
.
탄무誕无님의 댓글

*
나 탄무誕无는 말한다.
"일찍이 여기에 이르렀느냐?”
"그대는 이곳에 와 본 적이 있는가?"
조주가 말한 '여기', '이곳'은 장소가 아니다.'
제 1구句부터 아주 평범한 말로 부처의 정수精髓를 던졌다.
학인學人의 눈알을 완전히 뽑아버렸다.
학인은 자신의 눈알이 뽑힌 지도 모르고 있다.
'여기'라는 이 말의 묻는 낙처落處와 견처見處는
그 몸이 와 봤던 장소,
그 몸이 이곳으로부터 오기 전의 있었던 장소를 물은 게 아니다.
횡성수설함 없이 이러한 말을 바로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
'여기'란 부모로부터 나기 전前, 본래 그 몸이 있었던 자리다.
본래 모습(부처)에 대한 질문이다.
일상 언어에 고도로 함축된 선문禪問이다.
언어가 일반적인 뜻을 내포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의 언어로 사용되었다.
조주가 말한 '여기는 부처의 자리'다.
부처의 경지를 가리키고 있다.
학인은 조주가 묻는 말,
여기라는 곳을 장소를 물은 것으로 알고 대답해 버렸다.
얼빠진 녀석!
학인의 대답은 선사의 질문에 깜냥이 되지 않는다.
학인의 대답은 부처와 구조 십만 타불 동떨어져 있다.
학인은 깜냥이 되질 못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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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무誕无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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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탄무誕无는 말한다.
"차나 한잔 들게나!(끽다거喫茶去)”라고, 조주가 권했다.
여기엔 어떠한 뜻도 '없고', 아무런 신비적인 낌새도 '없다.'
차나 한잔 하게나는 평상심平常心을 가지라는 뜻이다.
평상의 마음이 바로 도道다.(平常心是道).
무엇을 일러 평상심이라 하는가?
인위적 조작과 주관적 가치판단이 '없고', 의도적 선택이 '없다.'
생사生死를 의식하여 조작하고 선택하는 '일체가 없는' 그것이 평상심이다.
존재에 대한 고착이나 방기가 '없고',
부처에 대한 환상이 '없는 곳'을 가리킨다.
없음(무, 공, 허)은 부처의 본체다.
진정한 평상심이란 인위적 조작이 /없고, 없고, 없다./
부처와 계합契合되어 있음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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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제 대선사께서'할喝'을 사용했다.
/ 할에 무슨 뜻이 있겠습니까?/
/ 생사 '없음'에 무슨 뜻이 있겠습니까?/
/ 부처의 본체本體, 공空에 무슨 뜻이 있겠습니까?/
/ 없다. 공空이다. 무無다. 허虛다./
/ 아무 뜻 '없는' 할은 부처의 본체를 가리킨다./
/ 인간의 본래 성품, 부처를 보라고 할喝로서 고함을 친 것이다./
*
*
* 학인學人과 원주院主는 콧구멍(코뚜레)은 지켰을지 모르나
* 어쩔꼬? 눈알은 뺏기고 말았으니
* '살아 도망칠 수 없고, 죽어 숨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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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무誕无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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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본래 면목)는 삶의 한가운데 있습니다.
부처(본래 면목)의 실제實際는
고요한 명상에 빠지거나 신기한 기벽에 빠져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명상은 간화선看話禪이 아닙니다.
부처는 삶의 공간 한가운데 있습니다.
확철대오한 자는 인과를 벗어나는 것(不落因果)이 아니라
인과 속에서 그것을 초월합니다.(不昧因果)
깨친 자는 세계를 움직이는 권능과 신통력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명예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세계를 보는 새로운 눈과, 삶을 대하는 새로운 태도를 갖추게 됩니다.
눈은 가로로 찢어져 있고, 코는 세로로 뻗어 있습니다.(眼橫鼻直).”
눈은 세로로 찢어져 있지 않고, 코는 가로 뻗어 있지 않습니다.
인위적인 조작(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인위적인 조작을 하게 되면 인과因果가 됩니다.
업業이 됩니다.
업은 죽어서 오라를 받아야 하는 영靈에 따라붙습니다.
인위적인 조작이 없어야 부처와 노닐 수 있습니다.
인연에 따르되 걸림이 없어야 합니다.
인위적인 조작을 하지 않아야 걸림이 생기지 않습니다.
일상적 사고습관을 버린 그 자리에 부처는 늘 그대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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