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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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극(無言劇) / 안희선
자정(子正),
바쁘고 고달펐던 걸음들이
낯선 관객의 얼굴로 되돌아간다
벅차오른 언어(言語)는 더 이상 아무 것도 말하지 않고
내가 앉은 자리 한 모퉁이에서 시들어간다
길을 찾을 수 없는 밤,
쓰러진다
나의 울타리 ―
쓰라린 얼굴로 증오를 속삭였을까
아니면,
환희의 얼굴로 사랑을 속삭였을까
나도 모른다
오직 거울 속의 꿈만이 어두운 무대를 밝히고 있을 뿐
이제 더 이상 빛나는 소리는 없어
대사도 없다
바람에 흐트러지는 몸이 가난한 손으로
지루했던 권태와 근심을 가리킨다
시계는 고민도 안하고 두 팔로 하늘을 가리킨다
불현듯, 시계치는 소리
* 캄캄한
어둠에서
때는
우네.
달 없고
소리
없는
한 밤중을 *
하지만,
그리움으로 치닫는 이 밤은 저 홀로 아름답기만 하다
무한한 동경(憧憬)과도 같이 ―
저무는 무대에 오래도록 남겨진 이 역할이 무엇인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다
제 모습에 지쳐 호소조차 못하는 괴로움은
삶의 어두운 집에서 그렇게 기나긴 꿈을 꾼다
가슴 솟구치는 다정한 손깃에
꿈처럼
깨어나길 기다리며
* '기욤 아뽈리네르'의 '子正' 全文 인용
<시작 메모>
투명한 날개 달린 사나이,
날지 못하는 슬픔
의젓한 삐에로의
화장 지운 이마에선
피가 흐르고
삽시간에
거대한 잎의 나무로 자라는,
미처 다 하지 못한
대사(臺詞)
댓글목록
탄무誕无님의 댓글

*
굉장한 시를 퍼 올려주셨습니다.
대단하고, 대단합니다.
부처의 눈으로 읽겠습니다.
* 캄캄한
어둠에서
때는
우네.
달 없고
소리
없는
한 밤중을 *
이 구절은
소동파蘇東坡의 '계성변시장광설溪聲便是長廣舌'을 넘어 서 있습니다.
마치 바쇼의 7언 구절을 읽은 거 같습니다.
소동파는 대오한 사람이고, 바쇼는 확철대오한 사람입니다.
대오은 이치적인 것이고, 확철대오는 진짜 부처와 계합한 자를 가리킵니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바로 바쇼가 떠올랐습니다.
이 구절은 확실한 선시禪詩입니다.
때가 달도 없고 소리도 없는, 아무것도 없는 부처의 본체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 때라는 본체가 깨어나라고 한밤중(깜깜한 밤, 미혹, 무명)에 우네.
운다는 것은 잠을 깨운다는 것이지요.
꿈에서 깨어나라고 우는 것이지요.
정말, 깊이 있고 대단한 구절입니다.
건강 더 악화하지 않으셔야 합니다.
살아 계십시오.
.
안희선님의 댓글의 댓글

부족한 글에 너무 과분한 말씀을 주시네요
고맙습니다
탄무 시인님,
늘 건강하시고 건필하시길 먼 곳에서 기원합니다
탄무誕无님의 댓글의 댓글

오타 수정 좀 하려고 했는데....???
너무 빨리 들어오셨습니다.
오타와 내용이 약간 불충분한 것은 밝은 눈으로,
넓은 혜량으로 살펴주십시오.
굽어살펴주소서.
과찬이 아닙니다.
이 구절이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좋아서 덩실덩실 어깨춤이 절로 나왔습니다.
좋은 시 읽게 해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_()_
탄무誕无님의 댓글의 댓글

시작을 알리는 1연 1행의 자정(子正),/은
틀림없는 그 시각時刻, 12시 정각正刻으로서
공(0, 영)시라고도 하지요.
/1연 1행의 자정(子正), 정각正刻은 같은 소리를 내는 '정각正覺'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 캄캄한
어둠에서
때는
우네.
달 없고
소리
없는
한 밤중을 * /
이 구절 정말 대단하고, 대단합니다.
다시 읽기를 해도 아주 좋습니다.
쓰러집니다. 쓰러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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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댓글에서 두 군데 오타가 났습니다.
* '바쇼의 7언 구절'이 아니라 ===> '바쇼의 17자로 이루어진 선시禪詩'로 바로 잡습니다.
* 대오은은 ===> 대오는으로 바로 잡습니다. / 오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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