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의 지갑에 들어 있는 혜안慧眼을 뽑아서 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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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의 지갑에 들어 있는 혜안을 뽑아서 갈긴다
법명法名/ 덕산德山
법호法號/ 탄무誕无
인간의 몸뚱이는
백 년도 채 못 사는 데 비해
부처는 영원한 것.
부처는 인간의 본성本性이며, 눈부신 진짜 사원寺院이다
가짜 절에 찾아가 가짜 불상 앞에 머리 처박고
엎드려 비는 것보다 자신에게 내재內在되어 있는
진짜 법당法堂을 찾아 들어가는 것이 가장 시급時急한 일이다
목숨 줄 끊어지기 전에,
수행修行이란 없는 것을
말로 꾸며내고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인간이 갖추고 있는 부처를 발견하는 일.
세상 모든 만물萬物은 이 부처에서 나왔다
눈이 심봉사인 미두迷頭는 묻는다
"부처는 어디서 나왔습니까?"
"깨침에 안 있나!"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죽음 후의 삶을 준비함임을 깨쳐라'
몸소 깨쳐 죽은 후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부처는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묻는다
문자만 주워 먹는 정신 나간 놈
눈물 나도록 간절하게 공부할 생각은 안 하고
"제 눈앞에 두고 어디 있느냐?"라고
또 묻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산 것에 대한
분하고 분한 마음으로 공부하여
부처가 되어라
* 부처/
인간의 본래 성품.
.)
댓글목록
cjssusandudtn님의 댓글

*
/ 부처가 되어야 부처에 대해 바르게 알 수 있다 /
부처를 직접 보지 못하면
제아무리 날고 긴다 해도
마음은 송장 지키는 귀신
.
풀하우스님의 댓글

부처를 직접 보지 못하면
제아무리 날고 긴다 해도
마음은 송장 지키는 귀신 /
멋진 표현입니다.
저는 육신을 똥공장이란 표현을 한 적이 있습니다.
경영주 즉 사장은 여래장이고...
실지시인 실견시인이란 말씀을 하십니다요
부처가 내가 하는 짓을 다 알고 다 본다
부처가 내가 생전에 한 짓을 다들 알고 다들 보기 때문에
내육신이 죽은 후
내혼에게 생전에 내가 지은 죄를 다들 세밀하게 밝혀내고 인과응보의 엄청난 오라로 기절시키는가 봅니다.
내가 부처인데 부처를 못 보는 것은
여래장이 챙챙 부처를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내눈에 모래를 넣어서 눈을 못 보는 것과 같은 이치다..
또한 내가 눈은 있는데 볼수없는 당달봉사라서 그러하다..
탄무스님,감사합니다.불볕더위 장마철에 항상 건강하십시요.
cjssusandudtn님의 댓글의 댓글

.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하나 바르게 가르쳐드리지요.
우리가 절에 가면, 또는 불교방송을 통해 스님이 스님에게 절을 삼배三拜하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삼배 받는 쪽은 큰스님이라는 호칭을 붙이기도 하지요.
(요즘은 개인 사찰 한두 개만 갖고 있어도 아무에게나 큰스님이라 부르지요. 이건 아주 잘못된 풍습입니다.)
삼배하는 쪽 스님은 깨치지 못한 학승이나 선승, 포교승입니다.(깨치지 못한 중은 다 포함됩니다)
삼배를 받는 쪽 스님을 '선지식善知識(선사禪師라고 보통 부름)'이라 합니다.
선사禪師(선지식善知識)는 깨친 사람을 부르는 이름이지요.
스님이라도 깨치지 못하면 출가자일 뿐 중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에게나 선사니, 선지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이고 죄악입니다.
선지식이란 말에는 지식을 착하고, 바르게 쓴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세상에는 지식을 악하게 쓰는 '악지식惡知識'들이 바글바글하며 더 설쳐대지요.
개인의 영달과 이익을 위해서 말입니다.
개인의 명예와 이익만을 추구하므로 지식이 사람에게, 사회에 악용되고 있지요.
선가禪家(불가佛家)에서 최고 어른은 법속, 출가한 시기, 생물학적 나이를 따르지 않습니다.
/깨친 사람이 최고 어른입니다./ 이건 깨친 '부처의 나이'로 살아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종단에서 품계를 수여할 때도 이러한 도리道理는 확실하게 따르고 있습니다.
선사禪師로 부르는 게 선가(깨친 세계, 부처)에 대한 바른 예의입니다.
저를 바르게 부르려고 한다면 '선사禪師'라고 부르셔야 합니다.
2008년도에 사문沙門 도창道窓(종단의 총무원장 자리를 세 번 거절함, 현 연인사 주지)으로부터
확철대오한 인가印可는 벌써 받았습니다.
여기서(연인사에서) 인터넷을 통해 오도송悟道頌을 부르며 무문관 강의를 1년 6개월 정도 했었습니다.
스님이라는 말의 유래는 해방 이후 1954년에 불교정화운동을 하면서
중이 어떻게 불리면 좋을까 하다가 /스승님/의 어운에서 /승/자만을 빼서
부르도록 한 것이 지금의 /스님/으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만들어진 이름입니다.
저 탄무는 출가 스님이 아닌 재가자在家子입니다.
법우님, 자리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더워지는 날씨에 건강관리 잘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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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무誕无님의 댓글의 댓글

제가 법우님께서 댓글난에 설명하시고 계신,
//부처가 내가 하는 짓을 다 알고 다 본다
//부처가 내가 생전에 한 짓을 다들 알고 다들 보기 때문에
//내육신이 죽은 후
//내혼에게 생전에 내가 지은 죄를 다들 세밀하게 밝혀내고 인과응보의 엄청난 오라로 기절시키는가 봅니다.
//내가 부처인데 부처를 못 보는 것은
//여래장이 챙챙 부처를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해 노래로 불러드리려 문서에 준비해놓고 있습니다.
법우님이 댓글란에서 하신 말씀, 옳고 옳습니다.
맞고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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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jssusandudtn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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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가 보고 있는 세상을 무엇으로 볼 수 있겠습니까?
깨친 이는 육안肉眼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육안으로 보기에 깨친 사람도 단순히 하나의 인간에 불과합니다.
깨친 이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죽을 수밖에 없는 몸을 가졌습니다.
깨친 이도 육안으로는 늙어 갈 것이며 죽게 됩니다.
그러나 부처의 눈으로 보면 깨친 이에게는 죽음은 없습니다.
부처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죽음이 없음을 볼 수 있습니다.
죽으면 몸이 죽는 것이지, 부처가 죽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가 되었다고 해서
감정도 없고, 배고프지 않고, 아프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몸을 가진 이상 생로병사, 희로애락은 누구든 피해 갈 수 없습니다.
중생은 장애와 경계 속에서 마음과 생각을 진짜 자기 자신이라 착각합니다.
평생 가짜 마음과 가짜 생각을 좇다가 그 가짜 마음과 생각에 인정사정 볼 것 없이 휘둘리고 다치지만,
부처는 어떤 장애든, 어떤 경계에서든 부처가 바로 들어옵니다.
취하려고 해서 취하는 것이 아니라 깨치면 부처는 저절로 발현發顯이 됩니다.
마음이 쉴 새 없이 일어나는 것처럼 어디서 무엇을 하든
/쉴 새 없이 부처가 저절로 발현되지 않는다면 깨친(확철대오) 것이 아닙니다./
늘 부처와 같이 있습니다. 붙어 있습니다. 떨어질 수 없습니다.
붙는 것도 아니고, 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부처를 보게 되면 부처와는 죽어도 이혼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음을
/부처와 죽어도 이혼은 성립되지 않는다/라고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
...............부처는 이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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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jssusandudtn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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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가짜가 많지만, 마음이 가짜인 것이 제일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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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현로님의 댓글

탄무뉨, 방가워여~~~~~~~~
낙담만 안 하면 즐거운 세상!!!!
더운데 시원스레 향필 하시고요, 종교적 성찰이 가득한 글도 좋지만
언제 한번 하산하셔서
미욱한 중생들이 좋아할 속세의 시도 한편 사사하시지요.
건강 유념하시고 댁내에 천운만객하시리라 빕니다.^^
cjssusandudtn님의 댓글의 댓글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잘 계시지요.
이 공부를 마치고부터는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 해서
낙담을 해 본 적은 없습니다.
그러한 경계에서는 항상 화두가 챙겨지는 공부가 저절로 발현이 됩니다.
어떠한 경계, 어떠한 장애 속에서도 화두는 곤두선 채 바로 들어옵니다.
미친 듯, 더 미친 듯이 공부하면서 간을 쓸어내리는 체험,
나도 모르게 다리가 휘청거린 적은 많이 있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나기 가장 어렵다 해서
인생난득人生難得에 이어
정법난득正法難得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가렵니다.
날씨가 매우 덥습니다.
건강 관리 잘하십시오.
자리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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