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광부의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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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광부의 분노 / 핑크샤워
이른 아침 노인 한 분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와 날 찾으며
웃옷을 벗어 소파에 패대기치며 말한다.
우리 젊을 때
탄광 하면 인생막장이라 했지
하지만 겪어보지 않고는 정말 몰라
새벽같이 일어나
모래알 같은 밥을 억지로 삼키고 출근해
후줄근한 작업복에 캡프차고 인차를 타면
꼭 죽으러 들어가는 것 같았어
허리를 펼 수도 없고
숨쉬기도 곤란한 개구멍을
방진 마스크 쓰고 동발을 지고 올라가서
죽탄 속에서 땀으로 목욕을 하고나면
힘이 다 빠지는 게 살고 싶지 않았어
동발이 툭툭 부러져나가고
언제 무너져 내릴지 모르는 노보리를
기어가며 X 빠지게 일을 해도
그 대가는 새 발의 피였어
입바른 소리라도 할라치면 찍혀서
뺑뺑이 돌리지를 않나
한 푼이라도 잘 벌려면
계원에게 잘 보여야만 했지, 그래도
사람취급도 못 받는 광산쟁이였지만
자식들 가르치는 재미로 열심히 일했지
그렇게 한 세월 보내고 그럭저럭 사는데
엊그제 병원에 가서 검진을 받아보니까
내 폐가 다 망가졌다지 뭐야
그 놈의 탄광에서 일한 탓이지
그런데 근로복지공단인지 뭔지는
내 폐 망가긴 건 탄광하고 상관이 없다
그러면서 이딴 것을 내게 보내 왔잖아
거두절미하고 산재보상 받도록 좀 해줘
나 돈 없어
보상받으면 그 때 줄 테니 꼭 받게 해줘
그래도 우리 시절이 더 나았나봐
개고생해서 대학까지 보낸 아들놈은
여지껏 취업도 못하고 알바 뛰고 있어
뭔 놈의 세상이 이러는지
그건 그렇고
그 뭐, 위임장인가 써야 하는 거 아냐?
노인은 위임장을 작성하고 나서
몇 가지 서류를 가져오란 말을 들은 후
부탁한다는 말을 마치고 사무실을 나갔다
노인이 앉았던 자리에는
노인을 닮은 젊은 한 사내가
지하 수천 미터 어둠 속에서 죽음을 헤치고
세상의 어둠을 밝힐 불을 열심히 캐고 있다.
댓글목록
그려그려님의 댓글

광부의 삶이 노인의 짧은 말 속에 생생하게 그려지는군요.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