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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광부의 분노

페이지 정보

작성자 profile_image 핑크샤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1건 조회 728회 작성일 16-06-25 08:33

본문

어느 광부의 분노 / 핑크샤워

 

 

이른 아침 노인 한 분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와 날 찾으며

웃옷을 벗어 소파에 패대기치며 말한다.

 

 

우리 젊을 때

탄광 하면 인생막장이라 했지

하지만 겪어보지 않고는 정말 몰라

새벽같이 일어나

모래알 같은 밥을 억지로 삼키고 출근해

후줄근한 작업복에 캡프차고 인차를 타면

꼭 죽으러 들어가는 것 같았어

허리를 펼 수도 없고

숨쉬기도 곤란한 개구멍을

방진 마스크 쓰고 동발을 지고 올라가서

죽탄 속에서 땀으로 목욕을 하고나면

힘이 다 빠지는 게 살고 싶지 않았어

동발이 툭툭 부러져나가고

언제 무너져 내릴지 모르는 노보리를

기어가며 X 빠지게 일을 해도

그 대가는 새 발의 피였어

입바른 소리라도 할라치면 찍혀서

뺑뺑이 돌리지를 않나

한 푼이라도 잘 벌려면

계원에게 잘 보여야만 했지, 그래도

사람취급도 못 받는 광산쟁이였지만

자식들 가르치는 재미로 열심히 일했지

그렇게 한 세월 보내고 그럭저럭 사는데

엊그제 병원에 가서 검진을 받아보니까

내 폐가 다 망가졌다지 뭐야

그 놈의 탄광에서 일한 탓이지

그런데 근로복지공단인지 뭔지는

내 폐 망가긴 건 탄광하고 상관이 없다

그러면서 이딴 것을 내게 보내 왔잖아

거두절미하고 산재보상 받도록 좀 해줘

나 돈 없어

보상받으면 그 때 줄 테니 꼭 받게 해줘

그래도 우리 시절이 더 나았나봐

개고생해서 대학까지 보낸 아들놈은

여지껏 취업도 못하고 알바 뛰고 있어

뭔 놈의 세상이 이러는지

그건 그렇고

그 뭐, 위임장인가 써야 하는 거 아냐?

노인은 위임장을 작성하고 나서

몇 가지 서류를 가져오란 말을 들은 후

부탁한다는 말을 마치고 사무실을 나갔다

 

 

노인이 앉았던 자리에는

노인을 닮은 젊은 한 사내가

지하 수천 미터 어둠 속에서 죽음을 헤치고

세상의 어둠을 밝힐 불을 열심히 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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