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쭉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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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쭉 길
오래전 석남사엔 짜리몽땅한 공양주와 주변머리 갉아먹은 처사가 있었다 어느 날 어린 진돗개 두 마리를 모셔왔다 여섯 식구가 철쭉밭 아래쪽에 살았다
개는 산기슭 산책을 즐겼다 가끔 시내에 나가면 북어나 멸치를 가져다 몰래 먹였다 비린 것을 마다하는 고독은 없으니까
요사채는 고릿적으로 기울었고 밤은 길었다 차가운 침묵을 깨는 건 풍경이었지만 풍경은 이내 몸 바꿔 계절을 흔들었다
개들은 더 멀리 산행을 나서곤 했는데 한 마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또 한 마리가 누런 털빛을 고르더니 숲으로 사라졌다 며칠이 흐른 후 개 한 마리가 돌아왔다 눈빛에 걸린 올가미가 아파 보였다 목덜미 깊숙이 쇳물이 녹아 너덜거렸다
그 밤 마른 가래 끓는 소리를 들었다 가까이 오지 말라 으르렁거리던 개는 다음 날 북어포처럼 누워 있었다 지게에 얹어 대웅전 바깥 커다란 나무 밑에 묻었다
뒤도 없이 하산하던 날 호두나무가 눈치 없이 퉁방울 떨구어댔고 개 한 마리 삼킨 나무는 부드러운 목덜미 같은 잎을 마구 흔들어주었다
댓글목록
활연님의 댓글

그곳이 멀지 않다
나희덕
바람 밖에서 살던 사람도
숨을 거둘 때는
비로소 사람 속으로 돌아온다
새도 죽을 때는
새 속으로 가서 뼈를 눕히리라
새들의 지저귐을 따라
아무리 마음을 뻗어 보아도
마지막 날개를 접는 데까지 가지 못했다
어느 겨울 아침
상처도 없이 숲길에 떨어진
새 한 마리
넓은 후박나무 잎으로
나는 그 작은 성지를 덮어 주었다
`
안희선님의 댓글

시인님 덕분에 철쭉길을 거닐어 봅니다
시가 날로 깊어져, 그 끝이 어디일지..
잘 감상하고 갑니다
활연님의 댓글의 댓글

그냥 산문이라고 봐야지요. 금방 끄적거린 것인데
시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즐거운 저녁 되십시오.
채송화님의 댓글

참, 혹시 진돗개가 청솔모 잡으러 갔다가 사고 당한 것 같네요. 철쭉 밑에 묻어주지 그러셨나요. 붉게 핀 꽃이 개 혀 모양이기도 하여서...청설모는 먹고 개는 묻어주고...측은한 마음이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습니다.
활연님의 댓글

그때 스님이 라스베이거스 사막에서 포교하다, 몸이 안 좋아
이곳 주지로 있었는데, 마당에 두 그루 큰 호두나무가 있었지요. 청설모 노략질에
거의 추수가 어려웠는데, 암묵적인 동의와 지지?를 받아(스님이 좀 신식?)
군에서 총 쏘던 실력으로 거의 이삼십 마리는 잡은 듯.
맛이 기막히다는 말을 듣고 몇몇 작당을 했지요. 주말에 올라오는 아가씨들을 꼬여
지지고 볶고 소주를 마시고, 그 중 한명이 성대법대 다니던 스님 조카였는데
한동안 그때 처자와 연애를 했지요.
또 그때 형이었던 사람은 아주 청설모를 해체하고 소고기처럼 만드는 솜씨가 있었는데
정말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날렵하고 깔끔한 솜씨였다는 생각.
그러니까 청설모는 미운 짓을 했고, 개는 식구였으니까
그런데 살생을 말아야 할 곳에서 총질이나 하고, 한 2년 살았던 것 같아요. 까마득한 옛날.
최근 가보니까, 많이 달라져 있더군요.
그 스님은 뉴스에서 접한 적 있는데 품에 너무 많은 돈을 지니고 출국하다가 잡혔다, 뭐 그런.
참 심심하고 외로운 날이었지만, 그때 여러 일을 묶으면
단편소설 하나는 나올 듯. 뒷산엔 철쭉이 흐드러져 환상이지요.
봄에는 가볼 만. 경기도 안성에 있는 절입니다.
한드기님의 댓글

제가 스물 한 살 때 친구형님 사냥총으로 청설모 한마리를 재미로 싸죽인 적 있죠.
짝잃은 한놈이 잣나무 가지 높이서 내려다보던 눈빛
오오래 눈에 밟혔습니다.
오늘 또
비린 것을 마다하는 고독은 없다 에
머뭇 입니다.
진국물 들이킨 것 같은 맛
잘 감상하였습니다.
활연님의 댓글

청설모는 총에 맞아도 호두를 까먹을 정도로 아주 독기가 있어요.
발톱이나 이빨이 발달한 듯하고 아주 까맣고...
그때 그런 무자비한 짓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몇몇 총각들이, 호기를 부린 것이겠지요. 그것도 절간에서 ㅋ.
우리가 음식으로 취하는 짐승도 영혼이 있을 것인데....쩝.
스님은 미국에 가서 한 일 년도 비우곤 했는데, 거의 내가 주지격이었다는.
나중엔 공부가 안되어서 나왔지만, 그래도 이런저런 일이 많았던 곳.
인도에서 날아오시고. ㅎ
그냥 이야기입니다. 저는 개를 그래서 안 키우지요. 죽는 모습만 한두 번 보았는데
참 안 좋았습니다.
김태운.님의 댓글

보살피던 개가 들에 나갔가다 짐승이 되어 돌아온 거겠죠
그렇게라도 위안을 삼아야할 듯
이야기처럼 부려놓은 시가 훨 정감이 가는군요
잘 감상햇습니다
활연님의 댓글

개들이 참 영민했어요. 죽는 순간까지도 품위를
잃지 않았는데, 산속이라 개들도 외로웠는지
잘 쏘다녔지요. 개 한 마리 수목장 한 것은 오래
기억에 남지요. 좋은 저녁 되십시오.
3연 퇴고,
요사채는 고려적으로 기울었고 밤은 길었다 돌계단처럼 차가운 침묵을 깨는 건 풍경이었지만 풍경은 이내 몸 바꿔 계절을 흔들었다 (더러 어여쁜 산행객을 꼬드겨 스님 몰래 총알을 놔 잡은 청설모를 시냇가에서 가죽 벗기고 멱을 따고 한 마장쯤에서 소주를 모셔와 서로의 목에 부었다 그러던 고시파들도 짐을 곧 아래쪽으로 부렸다)←시선이 분산되므로 삭제한 부분
하얀그림자2님의 댓글

나희덕 님 말대로
뿌리든 대지든
아님 하찮은 하루살이든
덩치 큰 코끼리는
호모사피엔스 인간이든
다 같은 길을 가고 있으매
수많은 명멸하는 존재들에
잠시 발길을 멈추고
옷깃을 여미는 것은
죄다
같은 로드 무비를 엮어가는 배우들이어선 아닌지.
산문시가 잘 맞는 듯
우리는 길도 짧기도 한
그 길위에 있으니~.
활연님의 댓글

나희덕 시인은 어조가 차분한데
철학적 깊이가 있지요.
연약한 듯한데 좋은 지점을 잘 찾아내는 시인.
이 시대에 서정성을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는데
결국 시인들은 마음의 진동에 기울어질 수밖에 없다,
물론 우리말 자장을 다양하게 하는 노력도 참 좋지만,
이미 다 해먹은 기성이라고 봐야겠지요.
오래된 교과서.
시는 새로움을 향한 유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좋은 밤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