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는 인간보다 더 잘 참고 견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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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는 인간보다 더 잘 참고 견딘다 *
천양을 겨누고 누워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는 되잖은
문장을 생각하다가
옛적 내간에나 있을 법한 문체라고 서늘히
거둔다
생각이 골몰해지면 사랑이다,
어원은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몰골사납게
생각이 많아도 항하사일 뿐이어서
모래알 누각은 쉬이 휩쓸릴 듯
잿더미만 끼얹는 생각이 부각처럼 딱딱하다
마른하늘에 양 떼를 놓아먹이다가도
매지구름 뜯어내 적시기도 하는 것이어서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죄가 되겠습니까,
는 문장을 곰곰이 적어볼 양인데
북창은 다만 어둡고 줄곧 화통 삶아대다가
느닷없이 모다깃매 때리는 소리
구름 꼭대기 뛰어내려
물매진 기울기로 한잔 따르는 고백 같은 소리
저린 발을 푼 바닥으로 빗물 골짜기
통각 잃은 구름 물고기 어질어질 흘러간다
* 「안네 프랑크의 일기」에서.
댓글목록
활연님의 댓글

눈귀, 사라진 말을 찾아라
김현
독자, 열흘 하고 닷새 전 일이네. 잠결에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가니 언 황발 소녀가 소리 없이 늙어가며, 아저씨 정적으로 가는 길이온데 말 한 모금만 마시게 해주오. 입을 벙긋대는 게 아닌가. 그에 내 어쩐 일인지 놀라지 아니하고 고부랑 소녀를 입안으로 불러들여 말 한 사발과 부사 한 알을 꼭 쥐여 주며 언제라도 입안을 지나가게 되면 들리어라 했네. 그에 한순간 더 늙은 소녀가 울며 가며 말하길, 아저씨 고마우이. 그래 내 하는 소리인데 내일 사람인지 귀신인지 모를 아리따운 언니 하나가 이 시간에 찾아와 말 좀 빌려주쇼 하면 우리 집 말은 어제 다 동났으니 다른 집으로 들려가거라 하쇼. 꼭 그러쇼. 내 그 폭삭 늙은 소녀의 말을 듣다가 반쯤 나간 넋을 다시 불러들여, 보니 잠결이었네. 소녀는 온데간데없고 말이 사라진 사발과 부사의 씨가 오도카니 나를 보고 있더군. 불현듯, 세상에 없는 가벼운 말들이 떠올랐네. 떠오른 말들을 건져 읊으며 다시 잠의 망망대해로 들었네. 잠시 후, 읊기를 마치고 눈을 떴네. 꿈은 사라지고 말들은 다시 세상에 없는 말이 되고 날은 사흘하고도 반나절이 지나 있었네. 허기가 지더군. 입안을 나왔네. 종이와 붓을 사볼 작정이었네. 생각해보니 옛날 옛적이었지. 입안샘을 거닐었네. 배다른 자식을 열하나 두고 뱃속에 하나를 더 둔 니꼴라이 나리와 열두 명의 본처를 둔 라이오밍 영감과 여섯 명의 부인과 두 번씩 결혼을 한 총각 까롤로스가 꼴좋게 말을 잃고 그 큰 방망이들을 내어놓고 꿀 먹은 유령처럼 샘 주변을 휘뚜루마뚜루 돌아다니고 있지 뭔가. 때마침 유령들 사이로 막가는 부인이 있어 입을 여니 막가는 부인이 말도 없이 구시렁거리더군. 이 늙어가는 사람 좀 보시게. 산 사람 말 사라지는 일 무엇이 대수라 그러시오. 말이 사라지더군. 나 역시 침묵에 대해 전혀 모르는 바는 아닐세. 오랜 시간 입안을 맴돌지 않았던가. 허나 내 암만도 그 황발 소녀인지 황발인지의 말이 영 잊히지 않아 그 길로 종이와 붓을 사 들고 와 이냥저냥 하다 독자, 자네에게 편지를 써 보내게 되었네. 언제라도 좋으니 자네가 이곳을 한 번 방문해 주면 좋겠네. 기척을 주면 내 내일 밤이라도 당장 그 말 없는 유령들을 어르고 달래 자네에게 보낼 것이니 그들과 함께 열흘 하고 닷새 전 밤으로 와주길 바라네. 몰래 사정을 살펴 조사해주게. 나는 자네가 올 때까지 가라앉은 말의 목록을 기억해 적어보도록 하겠네. 그게 이 말 사라진 사건을 해결하는 실마리가 될지도 모르잖은가.
1) 우리나라 최초의 서간체 탐정소설 『 』에 힘입었다. 『 』에는 정해진 인물, 사건, 배경이 없어 다양한 판본들이 존재한다. 이 때문에 여기, 모든 제목을『 』로 적어 읽는 이에게 고스란히 떠넘긴다.
2)『 』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니꼴라이는 『 』에서 열두 번째 처에게 죽임을 당한 이후에도 유령의 몸으로 『 』까지 배회한다.
3)『 』에서 열두 명의 첩들에게 버림을 당한 라이오밍은 그 후로도 『 』까지 열두 명의 본처들에게 붙어먹는다.
4)『 』부터 사라지기 시작하던 까롤로스는 『 』에서 여섯 명의 부인과 두 번씩 첫날밤을 보냈으나 단 한 번도 총각이 아닌 적이 없던 불운의 인물로 나타나 지금까지 사정없이 살아남았다.
5)『 』이후 사라졌던 막가는 부인은 『 』에서 마을의 세 난봉꾼들에게 두 딸을 잃고 홀로 살아가는 여인으로 재등장, 탐정과 범인과 사람과 귀신을 오가며 작품을 수상한 오리무중에 빠뜨린다. 그 오리무중은 오늘날의 독자들에게까지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다.
김현
강원도 철원에서 출생. 2009년 《작가세계》를 통해 등단.
김태운.님의 댓글

골몰해진 사랑은 몰골이 송연한 생각이다, 로 주물럭거려봅니다
어질어질 무량수의 고백 같은 소리로
언제보아도 훌륭한 묘사라는 생각
서늘하게 떠올리는
감사합니다
활연님의 댓글의 댓글

나에게 시는 무엇일까, 어쭙잖은 질문을 해보기도 하지요.
시에 의탁하고 굴러가는 바퀴가 생긴 것인지,
오래전 글들을 읽으면 참 일기도 많이 적었다 싶지요.
시와 연애 걸듯 사는 일과도 치열한 연애를 해야겠다는.
곧 봄이겠습니다. 쾌한 날 지으십시오.
채송화님의 댓글

여러 방향으로 변주되는 글들이 재미를 더합니다.
모르는 단어는 찾아가며 보는 것도 또한 재미.
덕분에 많이 배웁니다. 어쩌면 새로운 것은 새롭지
않은 것들이 있어서 새롭다고 말하는 것이라 여깁니다.
활연님의 댓글

여름 땡볕일 때 쓴 것인데, 계절감을 좀 줄이고,
연시풍으로 ㅎ. 요즘 시가 영 달라붙지 않아서.
읽는 것도 시들하고, 아마도 시 갱년기 같다는.
어찌 또 주말이~~~ 훨훨 재미나게 보내시길.
고현로님의 댓글

하하하 시 한 수 읽는데 30여분이 걸리네요.
낮은 시안으로 인한 답답함에 천양, 내간, 무량수, 항하사,
매지구름, 모다깃매, 통각까지 두루두루 사전 검색을 해봤습니다.
마른하늘에 매지구름이 양떼처럼 몰려오듯
많은 함의에 갸우뚱갸우뚱하다가 갑니다.
필건하세욤^^
* 시 공부가 참 좋은 것이 단어 습득에 큰 즐거움이 있습니다.
최근 '구라(동음의 일본어는 창고라는 뜻)'와
'야코(일본어로는 야우코외엔 동음조차 없음)'가
일본어가 아니라 순 우리말이라는 사실에 깜놀ㅋㅋ
활연님의 댓글

흑싸리!
요즘은 우리말이 거의 멸종기에 가까워졌다는 생각도 들지요.
ㅇㅅ(어이쿠,Oops), 참 난해한 어법도 있지요.
자꾸 호명해주지 않으면, 어느 나라 말인가 싶겠는데. 전엔
의도적으로 잘 안 쓰는 우리말들로 한 편 적은 것이 있는데.
아무튼 3초만 될 글을 30분 투자하셨으니, 언어의 질감은 그만큼.
사실 진실한 고백은 무언에 가깝다 생각하지만,
속에서만 부글부글 끓는 것을 객관화하고, 그리고 버리면 감정도
시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열공하시니 빛이 있으리라.
知命
활
새들이 물소리 벤 감흙1)을 물어다 뿌린다 밭은 허공,
햇빛 모서리 깨지는 창밖으로 먼, 눈자위 그을음을 닦으면 흑해 가온에 박힌 홍채가 붉다 중심은 늘옴치레기2)처럼 두꺼비 씨름이다
길미3) 느는 날떠귀4)를 주머니 깊숙이 찔러넣는다
노루막이5)에 걸터앉은 구름의 풍성한 지방으로 구새6)들이 날아간다
마기말로7), 낟가리 높은 내생이 미리 와 강목8) 치듯이
야코9) 죽어 무르박지르던10) 어둑새벽에서 새물내 나는 해거름까지 죄다 고자좆11)이다
부사리12) 몰아 자드락13)에 무텅이14) 일구고 조리차하게15) 불안하다가
구추뿔16)로 더러 흙빛 밤을 들이받았으나
속돌17)이 날아와 흙뒤18)를 끊었다
수챗구멍에서 별을 줍던 되모시19) 같은 날이 촉촉해질 때 어찌할 도리 없이 명命을 가늠하는 언저리에 닿게 되었다
들찌20) 우글거리는 가슴뼈 안쪽 옹송망송21) 성엣장들
거멓게 물갈음22) 하는 미세기23)를 바라본다
이제는 산멱통24)에 친 거미줄 거둬내고 불땀25) 조절하며 물초26)를 말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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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금광에서 파낸 금이 섞인 흙.
2) 늘었다 줄였다 하는 물건.
3) 빚돈에 더 붙어 느는 돈.
4) 그날의 운수.
5) 멧뿌리, 막다른 정상.
6) 광석 사이에 끼어 있는 산화된 다른 광물질 알맹이.
7) 실제라고 가정하는 말로.
8) 채광할 때 소득이 없는 작업.
9) 기(氣), 기운.
10) 짐승이 달려들어 물고 뜯고 차면서 해내다.
11) 바둑을 두는데 찌를 구멍이 있으나 찌르면 되잡히게 되므로 찌르지 못하는 말밭.
12) 머리를 잘 받는 버릇이 있는 황소.
13) 산기슭 비탈진 땅.
14) 거친 땅에 논밭을 일구어 곡식을 심는 일. 개간.
15) 아껴서 알뜰하게 쓰다.
16) 둘 다 곧게 선 쇠뿔.
17) 다공질의 가벼운 돌.
18) 아킬레스건.
19) 이혼하고 처녀 행세하는 여자, 돌싱.
20) 굶주려서 몸이 여위고 기운이 쇠약해지는 일. 기아.
21) 생각이 잘 떠오르지 않고 정신이 몽롱한 모양.
22) 광택이 나도록 석재의 표면을 물을 쳐 가며 가는 일.
23) 밀물과 썰물.
24) 살아 있는 동물의 멱구멍.
25) 화력이 세고 약한 정도.
26) 온통 물에 젖은 상태.
두저문님의 댓글의 댓글

위대한 개츠비 ㅋㅋㅋ
외계어가 아니라서 참 다행입니다.
암호를 해독하기 위해 별궁리 다하지 않아도 되는
위대한 활,
님.
늘 좋은 걸 보여주시고 그늘볕처럼 향초롭습네다. ㅋㅋ
이거 말 되남유?
활연님의 댓글의 댓글

자주 오시니 좋습니다.
다양한 시가 있다면 읽을 것도 다양해진다는 생각이 듭니다.
생소한 어휘를 동원했는데
주석이 없다면 알아먹기 힘들지요.
우리말인데도 말입니다.
좋은 시로 자주 봬요.
고현로님의 댓글

"새들이 물소리 벤 감흙을 물어다 뿌린다. 밭은 허공, 햇빛 모서리 깨지는 창밖으로 먼, 눈자위 그을음을 닦으면 흑해 가온에 박힌 홍채가 붉다. 중심은 늘옴치레기처럼 두꺼비 씨름이다. 길미느는 날떠귀를 주머니 깊숙이 찔러넣는다. 노루막이에 걸터앉은 구름의 풍성한 지방으로 구새들이 날아간다. 마기말로, 낟가리 높은 내생이 미리 와 강목치듯이 야코죽어 무르박지르던 어둑새벽에서 새물내 나는 해거름까지 죄다 고자좆이다. 부사리 몰아 자드락에 무텅이 일구고 조리차하게 불안하다가 구추뿔로 더러 흙빛 밤을 들이받았으나 속돌이 날아와 흙뒤를 끊었다. 수챗구멍에서 별을 줍던 되모시 같은 날이 촉촉해질 때 어찌할 도리 없이 명命을 가늠하는 언저리에 닿게 되었다. 들찌 우글거리는 가슴뼈 안쪽 옹송망송 성엣장들 거멓게 물갈음 하는 미세기를 바라본다. 이제는 산멱통에 친 거미줄 거둬내고 불땀 조절하며 물초를 말려야 한다."
이렇게 주석을 빼고 맞춤법 검사기 4개를 돌려보니까, 서로 다 다른 기준으로 제멋대로 나옵니다. 검사기가 머리 아파 죽을라 하네요. 영어,외국어 문법에는 민감하면서 통일된 맞춤법 검사기도 하나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 결국 씨 감자 보존하듯 시인들 손에서라야 온전한 씨가 보존되려나 봅니다.
활연님의 댓글의 댓글

보통 대학생들이 바퀴벌레22,000단어를 외우고 고시 공부한다면 바퀴33,000단어를
숙지해야 하는데 우리말은 고작 500단어도 잘 안 쓰지요. 우리말은 상당히 발달한
언어이고 아름다운 언어인데, 점차, 사멸하는 어휘가 많아지고. 광고나 간판을 보면 죄다
영어나 불어 따위. 언어적 사대주의에 물들어 있다 그런 생각도 들지요. 문법검사기도
자주 오류가 나오는데, 특히 명사 어휘나 잘 안 쓰는 동사는 인식을 못 하지요.
언어는 사람이나 한 민족의 정신과 연관이 있는데 우리말은 점차 구식이 되고 영어는
어린아이부터 버터를 바른 발음이 정확하고, 우리말은 영희야 철수야에 그친다면
문제가 되겠지요. 우리말보다 영어를 먼저 배우는 세상이니, 글 쓰는 사람이라도 우리말
우리 정서와 연관된 언어를 붙들고 있어야 할 듯.
원스톤님의 댓글

활연님의 화려한 수사에 머리가 어질어질...
저의 얕은 지식을 깨닫게 하는 활연님에게 늘 감사^^
활연님의 댓글

화려한 수사학이라기보다 최소한의 우리말들인데 그것조차 낯설다는
것이겠지요. 시는 수사학보다는 다른 것에 더 기댄다는 생각을 합니다.
시인들조차 순우리말에 인색하고 모른다는 식으로 외면하는데 정작 아는
말이 얼마인가 물으면 할 말 없지요. 모국어에 대한 이해가 우선이고 그래야
시도 있을 것입니다. 수사가 화려하다면 아무 내용 없다와 비슷한 어감이지요.
그러나 수사학은 언어를 다루는 기본기이기도 하겠는데.
좋은 시로 자주 봬요.
원스톤님의 댓글

보통 대학생들이 바퀴벌레22,000단어를 외우고 고시 공부한다면 바퀴33,000단어를
숙지해야 하는데 우리말은 고작 500단어도 잘 안 쓰지요... 라는 댓글
통감합니다.
그리고 좀 전에 빼먹었는데 활연님의 시에는 화려한 감동이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활연님의 댓글

현대시는 참 건조하고 딱딱한 느낌이 드는데, 적당한 수분은
시를 읽기 좋게 한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곳에도 진짜 시를 놓으면
읽으려 하지 않지요. 시는 아주 작은 진동이거나, 아주 사소한 것이
준동한다는 생각을 하는데, 요즘 세상이 워낙 감각적이라 시는
다른 감각을 환기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화려한 감동?! ㅎㅎ
그런 걸 뿌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글 몇 줄이 무얼까, 요즘 고민하는
바이지요. 늘 즐겁게 시와 더불어, 생각의 여울 세차게 헤쳐나가시길.
양철붕어님의 댓글

반가운 필명에 대문을 열고 들어오면
시제라는 첫번째 검색대에 걸려 꼼짝 못하고 있습니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아무 것도
가저갈수 없는
빠져 나갈수도 없는 케코바 미로 같은 고대 수중도시를 만남니다
귀한 진주알 오늘도 줄에 꿰지 못하고
낱알만 만지작거리다 갑니다
요즈음은 시가 나를 갉아 먹어와 먼산보기로 살아갑니다
활연님의 댓글

안네 프랑크(Anne Frank, 1929.6.12 ~ 1945.3)는 15년 남짓 생을 살다 갔지만, 작가로 남았지요.
동화, 단편소설, 수필 등을 썼는데 2년 정도 숨어 사는 기간에.
그녀는 오래전 죽었지만, 글은 남아 있지요. 글이 사람보다 오래 사는 건 맞는 것 같은데
얼마나 절실하고 처절하게 쓴 글인가, 물으면 할 말이 없어지지요.
시적인 갈망을 적은 것인데, 그것이 해갈될 한바탕 빗줄기로 시원하게 내릴 것인지.
구름 속을 떠도는 얘기로 그칠 것인지.
시는 이런 직접적인 언술과 거리가 있지만, 어디 뒹구는 글 조금 손 본 것이랍니다.
짧은 2월이 빠르게 흐르네요. 늘 건강하시고 좋은 시로 자주 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