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4】제4기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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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4期의 시간
그렇다.
이젠 시간도 내 편이 아니다.
그냥 헛구역질이 나고 어지럽다.
너무 오래된 듯한 지점이 자꾸만 가슴 안쪽에 달라붙지만
왠지 나는 아무렇지 않다.
여느 때처럼 아침이 오고
창밖으론 함박눈이 내리고
시가지에 뿌려지는 음악이 검은 발에 차인다.
턱없이 모자라 경적 울리며 비켜갈 시간이라도 있나.
잠이 들면 그대로 구부린 채로 다시는 깨지 않는 잠.
가본 적 없는 곳에 아릿아릿 닿을 듯.
아무렴 누구나 백 년에 한 번 만나는 걸 내가 먼저 알았을 뿐이다.
시간은 작두날 같아서 눈 내리는 밖도 비 오시는 오후도
이만 그쳐야 할 것을 알았으므로 다행이다.
친구들을 만나면 먼 옛날을 얘기하고
오래된 시간을 썩둑썩둑 썰어 재미있다가
먼 훗날에 대해서는 아무 할 말이 없으므로 다행이다.
외로운 척도 아픈 척도 말아야겠다.
바람이 창문에 부딪히는 소리,
천천히 굳어질 때 울음소리 어금니로 깨문 눈시울 젖는 소리,
아아, 더 희미해져 저 멀리 들리는 세상의 소리.
흰빛에 스미면 옷깃에 앉은 함박눈을 털듯
훌훌 기억을 버릴 수 있을까.
살아온 날을 사랑한다 말할 수 있어 다행이다.
누군가의 마음에 그립다는 말,
희미해지고 아련해져 갈 것이므로 다행이다.
너무 부족했으나 너무 충만했던 시간.
하나의 표정으로도 한평생 그리워하고 꽃은 꺾여 피 흘리며 아파도
역시 꽃일 것이므로.
창턱에 쌓이던 먼지와 콧날을 깨뜨리던 겨울바람과
밤하늘 깜박거리던 별빛과 이름을 다 기억할 수 없는 사소한 것들.
나를 온통 흔들어 놓았던 그 많은 순간 그리고 마주 앉았던 인연들.
모든 순간이 끝을 향한 여정이다. 그냥 놔두면 된다.*
지붕 위에 하얗게 번진 눈밭, 아무도 일구지 않는 눈밭에
발자국을 찍으며 걸어가는 듯하다.
더는 잇고 붙일 수 없는 시간
사랑했다고 말하자.
* 영화, Now is Good(2012, 올 파커 감독)에서.
댓글목록
활연님의 댓글

겨울의 중심
박연준
무릎이 앙상해질 때
창문 밖에서
배고픈 택시들 질주하는 소리 들릴 때
겨울은 중심으로 응집된다
오른쪽 눈이 침침해졌다
비밀의 농도가 조금 옅어졌다
말없이 지구를 굴리던 사바나 코끼리가
잠시 한숨 쉬는 사이
무릎이 해진 바지를 입고
아침부터 책상까지
5시부터 음악까지
서성이고 싶다
`
고현로님의 댓글

*^^*
시가 짱 좋은데요.
집채만 한 미농지 펼쳐 놓고 배 깔고 봉황의 깃털 하나 뽑아
쓰적쓰적 써내려 오신 것 같습니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우아한 느낌입니다.
편하게 읽히는 고뇌와 번뇌의 사유, 잘 나간다던 친구 하나 인생사 덧없다며
시골 친구의 눈높이대로 막걸리 한 잔 철철 따라주는 맛이 납니다.
본심을 내보이는 것은 이번이 처음 아니신가...
참 좋다, 멋지다는 느낌입니다.
활연님의 댓글의 댓글

다코타 패닝이 시한부 삶을 연기한 것이
Now is Good인데요. 다소 당돌한 버킷 리스트를 적어두고
조금씩 죽어간다는 얘기, 너무 어린 나이에...
이 글이 생각나더군요.
시적인 기교가 없지만, 담담하게, 쓴 글이지요.
이 글 화자는 지금은 세상에 없는 사람이 되었는데...
삶은 순간의 연속일 뿐이다. 그 순간의 시퀀스는 소중하다,
뭐 그런 생각이 들지요. 허겁지겁 살아가지만 종착지가 분명한.
사람을 사랑한 기억이 최종적인 것이라면, 괜찮은 삶이겠지요.
두저문님의 댓글

걸작선 중의 대작을 본 듯 합니다.
사라지고 없지만 시향은 사라지지 않고,
오래도록......
활연님의 댓글

저는 누구신지 대략 짐작이 됩니다. 요즘 읽는 재미를
주시니, 감사.
두저문님의 댓글의 댓글

이미지 5번 봄
봄
이 세상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봄에게 인사말을 건네고 싶다.
안녕, 봄아 싱그러운 살내음이 좋구나.
기나한 씨앗의 내부를 관통하는 미로에서 만난 사이처럼 우리 앳되기로 해. 모낭에 고인 물소리와 내장 속 융모의 태고 적 어간이 닮았지. 뼈를 발라낸 봄이 형체 없는 가루가 되었을지라도 불변의 어원을 향해 가야 하는 거야,
조카 준호를 사랑하는 방식은 새싹이 봄을 찾아가는 거룩한 어순,
미로에서 만난 다섯 살의 형과 아버지, 그 보다 더 일찍 봄이 된 선조와 싱그러운 계보,
애순을 맞는 봄마중 티 없는 조카의 얼굴이다.
봄,
봄아,
사뿐히 미끄러져 내린 줄기의 봄처녀와 사랑하고 싶다, 허릿단처럼 바람굽이 휘어진 황홀한 곡선이 물살을 재우듯 잔잔한 하류삼각주에 이르고 싶어라.
기나한 바깥은 유리병주둥이의 평사면 위에서 만나지 않고 한없이 종주하는 일. 세상 모든 햇빛과 달빛, 총총한 별빛마저 담겼었지만 생애 단 한 번도 구하지 못한 봄빛은,
봄처녀를 사랑하는 방식은 나비가 꽃물에 발을 적시는 날갯짓,
푸른 지구가 어두운 우주의 꽃밭을 떠다닐 수 있는 원론적 모티브,
내가 별의 삼각주를 지구라 했을 때 외롭고 따스한 봄은...
봄은,
봄은,
기울인 잔의 향취처럼,
봄,
봄,
또 다시 봄,
봄이여.
최승화님의 댓글

나도 임신 4기인지 헛구역질어 자꾸 나는데...
곧 뭐든 태어나긴 하겠습니다.
삶은 죽음의 근친이라고 들었습니다.
활연님의 댓글

요즘 출산을 많이 하니까 맞는 말인 듯.
동백은 지지리 오래 폼 잡다가 꽃 피면
모가지 툭 떨어진다지요. 삶도 그러겠다는.
원스톤님의 댓글

시간은 작두날 같아서 이만 그쳐야 할 것을 알았으므로
다시 올라탈 때도 알겠지요...
활연님의 시는 생각없이 사는 저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끔 만드네요.~~
활연님의 댓글

지나면 다 아쉽고 그립고 그러겠지요.
시간을 마구 낭비하며 살면서도 정작 소중한 것을 모르며 사는 건 아닌가 싶어요.
삶과 죽음이 다 한 끗 차이일 뿐이라, 현재도 다투어 사라지고.
시간의 말고삐를 잡아채서 늘 유익한 시간 만드시길 바랄게요.
늘 복 된 날 지으시길 바랍니다.
동피랑님의 댓글

작년 이른 봄 이곳 아주 가까운 섬 만지도 출렁다리 구경갔다가 다리보다는 동백꽃에 반해버린 적이 있습니다.
둘러싼 쪽빛 바다의 땅을 배경으로 밟히는 동백이 레드카펫 같았습니다.
한잔 걸친 초로의 손님이 오셔서 다짜고짜 백세시대 노래를 부르며 이슬이 맺히길래, 같이 흥을 맞추다 콧날이 시큰했네요.
다양한 카드 즐비한 백화점은 의도와 상관없이 고개만족 1위다는 생각을 들게합니다.
벌써 2월도 하프라인을 통과했네요. 잘 가는 시속에 브레이크가 터졌나봅니다.
쾌속 질주하여 시든 황금이든 왕창 거머쥐시길 바랍니다.
현탁님의 댓글

득도 하신듯 합니다 왠지 센치해지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느 것도 고인적 없으니 흘러야지요
그렇게 흘러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이 생이라면요.......
박커스님의 댓글

50넘어서 무섭고 두렵고 시간은 화살 같고 장면 장면 모두가 소중한데,
감사하다, 다행이다, 한마디 말도 못하는,,,,오늘은 넘 콧등을 치십니다.^^
최정신님의 댓글

더는 잇고 붙일 수 없는 시간...
참 쉽고 부드럽게 읽히지만 연마한 내공이 고수의 칼끝이네요.
한드기님의 댓글

'아! 이 시 차암 좋다
찡~하다' 입니다. ㅎ
한쿠욱, 엄청 춥네요.
저야 곧 뜨거운 곳으로 다시 복귀하지만,
건안하시길 빌며...
이만 물러갑니다.
잘 감상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