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3] 감의 기록-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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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甘의 기록 / 테우리
1.
거르면 큰일 날 것 같은 점심을 대충 때우고 아직은 널널한 시간의 안내를 따라 회사 담벼락을 붙들고 이리와 저리를 밀고 당겼다
담 넘어 감귤밭 언저리에서 불알 같은 놈 주렁주렁 달고 실례를 하는지 우두커니 망설이는 둥치, 보는 둥 마는 둥 누런 낌새다
허접한 생김새로 보아 색다르구나 싶어 감이 잡힐 듯 말 듯 하던 차, 뒤늦게야 그게 감나무인 걸 깨달았다
순간, 혓바닥으로 군침이 고인다
감로수甘露水 생각 때문이겠지
2.
그 달작지근의 감상이 꼬리를 감춘 건 설익은 감의 떨떠름한 맛
그럼에도 그 맛이 단맛을 대신하던 때가 그리울 때가 있다
뱃속 헛바람에 휘둘리며 소풍이다 운동회다 핑계가 생기는 족족 냉큼 따서 씹어먹던 생각, 그 흐릿한 각막으로 간혹 떠오르는
장면은 온갖 애환을 품은 쓸쓸한 마당에 홀로 덕지덕지 늙어버린 고목의 망상으로 둘러싸인 어느 초상이다
긴 세월을 반으로 접은 중력의 블랙홀을 따라 잽싸게 거슬러보자, 요즘처럼 흔한 감귤조차 맛보기 시원찮던 그 시작에서부터
설사 봤더라도 그 계통은 막상 탱자의 사촌쯤이라 본체만체하던 그 끝까지 신맛이 곧 천연 비타민이요 에너지원이었다는 사실
혹시 홍시를 사랑하는 까마귄들 눈치 챘을까
귤이나 붙들고 ‘시큼하다, 시다, 정말 시다’로 지껄이는 지금 이 늘그막에야 겨우 개미 손톱만치 깨닫고 있으니
아무래도 난 여태의 시큰둥한 시간 속을 헤매는 중이다
3.
현명한 섬사람들 떫은 것들 애써 그냥 먹기만 했을까 아님 우려먹기만 했을까 천부당만부당이다 이놈은 다재다능하여 떫은
것조차 옷감으로 거들었으니 채 익지도 않은 것들 질근질근 짜내고 우린 물로 정성들여 무명천에 물들이면 천연갈색 또는
고동색의 질긴 갈옷이 되었으니 입으면 시원하고 땀에 절인 것 그냥 두어도 썩기는커녕 냄새도 없었으니 유사 이래 이보다
신비한 옷감이 있었을까
천할 대로 천한 옷, 가난한 사람들 마지못해 입던 갈옷
갈중이 갈적삼이라 부르던 가을 같은 바지 저고리
어느새 초특급 웰빙패션으로 유행을 타더니만
어느 디자이너 왈 엘레강스라던데,
4.
감이면 어떻고 귤이면 어떠랴
유감 예감 육감 미감 촉감으로 새긴 숱한 감정의 말씀들
생각도 가지가지 쓸모도 가지가지
이들이 바로 그 색색을 아우르는구나
떫다 시다 불평처럼 떠벌리던 나무
귤나무도 그냥 감甘나무면 어떨까
달면 먹고 쓰면 뱉으면 될 일
시도 때를 아는지 감이 떨어지는 지금이지만
영감이든 땡감이든 싯감이든
감이면 무작정 좋다
이젠 그 샘이 말라붙어 감로수는 글렀으니
구강마저 말라붙기 전에 감로주라도
쭈욱 걸쳐야 쓰겄다
댓글목록
고현로님의 댓글

장문의 시를 술술술 풀어내시는 게 신선한 감귤을 드셔서 그런가 봅니다.
시큼새콤달콤한 귤맛 나는 작품 또 기대해봅니다.
김태운.님의 댓글

장문이다 보니 좀 뒤죽박죽이네요
더 다듬어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승화님의 댓글

와- 길다.
김태운.님의 댓글

네, 나름 기록이라 좀 깁니다
허영숙님의 댓글

한 알의 감에 이토록 긴 기록이 있군요
거침없이 풀어가는 서술에 압도 당하면서
엮은 곶감 빼먹듯 하나씩 읽습니다
김태운.님의 댓글

길기만 했지 실속이 없는 시큰둥한 맛이랍니다
꽁무니만 길게 늘어뜨리다 보니 되지도 않은 말들
뒷발길질에 스스로 채이는 형국입니다
들여다보고 다시 되돌아보고, ㅎㅎ
감사합니다, 허시인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