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밗 > 창작시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시마을 Youtube Channel

  • 이달의 우수창작시 발표
  • 시마을 공모이벤트 우수작 발표

창작시

  • HOME
  • 창작의 향기
  • 창작시

(운영자 : 최정신,조경희,허영숙)

☞ 舊. 창작시 ♨ 맞춤법검사기

 

등단작가및 미등단 작가 모두가 글을 올릴 수 있는 공간입니다

▷모든 저작권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무단인용이나 표절을 금합니다

시스템 오류에 대비해 게시물은 따로 보관해두시기 바랍니다
※ 시는 하루 한 편 만 올려주시기 바라며, 초중고생 등 청소년은 청소년방을 이용해 주세요
타인에 대한 비방,욕설, 시가 아닌 개인의 의견, 특정종교에 편향된 글은 삼가바랍니다

▷금품을 요구 하거나 상업적 행위를 하는 회원이 있을 경우 운영위원회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첫밗

페이지 정보

작성자 profile_image 활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12건 조회 1,066회 작성일 16-01-26 10:28

본문


첫밗




어드메 귀틀집 털렸나 보다
개켜둔 솜이불 펴고

가슴골 여민 저고리 풀고
홑단치마 내린다
사그랑주머니 짤랑거리는 
빈 우물[井] 소복한 올림표(#)
청동기가 홀현홀몰 제련한
까치 소리 첫밗에 떨어진다 
달아오는 화로에 부린
몇 송이*

느닷없이 출몰한 백색종(種)

대저, 흰 돛배 밀며 멀다



       * 홍로점설(紅爐點雪)

추천0

댓글목록

활연님의 댓글

profile_image 활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폭설 
  - 山居

            장석남


  밤사이 폭설이 내려서 소나무 가지가 찢어지는 소리
  폭설이 끊임없이 아무 소리 없이 피가 새듯 내려서 오래 묵은 소나무 가지가 찢어져 꺾이는 소리, 비명을 치며
  꺾이는 소리, 한도 없이 부드러웁게 어둠 한 켠을 갉으며 눈은 내려서 시내도 집도 인정도 가리지 않고 비닐하우스도  폭도도 바다도 길도 가리지 않고 아주 조그만 눈송이들을 내려서 소나무 가지에도 앉아
  부드러움이 저렇게 무겁게 쌓여서
  부드러움이 가지를 으깨듯 천근 만근이 되어
  소나무 가지를 으깨듯 찢는 소리를
  무엇이든 한번쯤 견디어 본 사람이라면 미간에 골이 질,
  창자를 휘돌아치는
  저 소리를
  내 생애의 골짜기 마다에는 두어야겠다

  사랑이 저렇듯 깊어서, 깊고 깊어서
  우리를 찢어 놓는 것을
  부드럽고 아름다운 사랑이 소리도 없이 깊어서
  나와 이웃과 나라가 모두, 인류가
  사랑 아래 덮인다
  하나씩 하나씩
  한 켜씩 한 켜씩 한 켜씩
  한 자씩 두 자씩 쌓여서
  더 이상 휠 수 없고 더 이상 내려놓을 수 없고 버틸 수 없어서 꺾어질 때, 찢어질 때, 부러지고 으깨어질 때 그 비명을 우리는 사랑의 속삭임이라고 부르자

  사랑에 찢기기 전에 꿈꾸고
  사랑에 찢기기 전에 꿈으로 달려가고
  찢기기 전에 숨는 굴뚝새가 되어서
  속삭임들을 듣는다
  이 사랑의 방법을 나는 이제야 눈치 채고
  이제야 혼자 웃는다

  눈은 무릎을, 허리를 차오르고 있다
  눈은 가슴께에 차오른다
  한없이 눈은, 소리도 없이 눈은
  겨울보다도 더 많이 내려 쌓인다
  오, 사랑이란
  저러한 大寂(대적)의 이력서다.


`

활연님의 댓글

profile_image 활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오동나무가 있던 집의 기록 2

            장석남

 

  그해 여름 아버지와 나는 동네 공터를 갈아 배추씨를 뿌렸다. 유난히 넓었던 오동나무 잎이 일찍 지더니 아버지는 아팠다. 아버지는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그늘을 거두었다. '늬아베등가죽위에우리여덟식구가다올라탄형국이여'라고 하시던 할머니의 말씀이 생각났다. 아버지 묻고 아버지와 심은 김장 배추를 뽑으로 갔다. 추운 바람 속에서 배추를 뽑으며 나는 사는 것이 참 치사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집을 떠났다. 도화2동. 10년을 살았다. 얽히고설키어. 화수동 일대를 지나 도화2동을 우리는 모두 떠났다. 가도 가도 남는 앞의 아득한 길을 바라보면서 간혹은 불빛 속으로, 간혹은 어둠 속으로, 간혹은 눈물 속으로, 모두가 모두를 멀리 두고 그립기 위하여. 어디가 끝일까 궁금한 표정으로 말없이 떠났다. 간혹은 만나고 간혹은 만나지 않고. 그러나 아무것도 꿈에도 보이지 않았다. 다 지긋지긋한 삶이었다.

  늦은 밤이면 베란다 창에 별이 와 빛난다. '다 괜찮아, 다 괜찮다니까' 그러나 답변은 없다. 어머니는 새벽까지 아프지만 아무도 그 아픔의 베란다를 내다보지는 않는다. 하여 '다 괜찮다' 는 말이 어머니는 그립다.

 

`

활연님의 댓글

profile_image 활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風笛 10

  장석남



  그대에게 올라가는 사닥다리가
  너무 길었구나

  허공에 房을 들이고 앉았다가
  진눈깨비처럼 쏟아진다



`

양철붕어님의 댓글

profile_image 양철붕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들어 보지도 눈에 스처간적도 없는 문자 첫밗의 시제에
회벽을 만난듯합니다
알듯 말듯 실루엣쯤으로 문장을 개득하고 알 수 없는 부호들만 머리속에 줄을 댑니다
막혀오는 가슴에 올려주신 장석남님의 글 세편을 내리 읽으며
큰 깨닳음 하나를 가슴에 비수처럼 담습니다
소장하다 언제라도 찔리고 피도 흘리면서 문장을 바로 세워봐야 겠다는 다짐요
시마을에 활연님 발자국의 간격이 좁아져서 참 좋습니다
쭉 직진했으면.............

활연님의 댓글

profile_image 활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살구나무 여인숙
 -제주에서 달포 남짓 살 때

  장석남



  마당에는 살구나무가 한 주 서 있었다
  일층엔 주인이 살고
  그 옆에는 바다 소리가 살았다
  아주 작은 방들이 여럿
  하나씩 내놓은 창엔
  살구나무에 놀러 온 하늘이 살았다
  형광등에서는 쉬라쉬라 소리가 났다
  가슴 복잡한 낙서들이 파르르 떨었다
  가끔 옆방에서는 대통령으로 덮은
  짜장면 그릇이 나와 있었다
  감색 목도리를 한 새가 하나 자주 왔으나
  어느 날 주인집 고양이가
  총총히 물고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살구나무엔 새의 자리가 하나 비었으나
  그냥 맑았다 나는 나왔으나 그 집은
  그냥 맑았다 


  장석남은 미당의 적자다, 라는 소리가 있는데 서정성이 강한 편이겠지요.
  오십대 이상의 시와 그 이하의 시가 통상적으론 다르다는 생각이 드는데,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에서 미메시스, 당대의 비극은 무엇인가? 이것은 어느 시대나 유효하겠지요. 시는 계승하고 발전하고 거부하고 생성한다,는 생각도 들지만, 딱히 정답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래는 인용문.(홍's 도서 리뷰, 글쓴이를 정확히는 모름)


《아리스토텔레스의 미메시스는 왜 비극을 택했는가?》
  아리스토텔레스,『시학』

  사전에 시학을 검색해보면 대충 <시의 본질 및 내용, 형식, 종류, 시작(詩作) 원칙, 조건 등에 관한 학문>정도로 나옵니다. 좀 더 간단히 축약하자면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아리스토텔레스 나름의 문학론을 전개한 책이란 말이죠. 대뜸 말해보자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크게 문학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것은 곧 <재현>이라고 대답했습니다.1 이어서 재현하는 기술을 구분하는 세 가지 기준, 즉 재현 행위의 수단(en hois), 대상(ha) 그리고 방식(ho's)에 대해서 열거하지요. 하지만 여기서 단순한 <재현>이라고만 말한다면 이 용어의 사전상의 정의인 <다시 나타남, 또는 다시 나타냄>이란 뜻에 매몰될 우려가 있습니다. 그는 재현을 모방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 말인 <미메시스(Mime'sis)>라고 명명하고 있는데, 이 의미가 단순히 우리가 생각하는 그 재현과는 정의가 다릅니다.

  하지만 이 얘기를 하기 전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왜 문학을 하려고 하는가, 내지 시인의 영감은 어디로부터 비롯하는가?>라는 문제를 먼저 해결하려고 합니다ㅡ왜냐하면 이 질문에 답하는 것으로부터 미메시스에 대한 본성이 도출되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플라톤의 경우에는 어떤 <지식(sophia)>로부터 문학이 발원하는 것이 아닌, 타고난 본성과 신이 부여한 능력 덕분이거나 혹은 뮤즈가 불러일으킨 열정과 광기의 탓(apo Mouso'n katoko'khe' te mania)으로 문학을 이해했습니다.2 따라서 이성적 질서에 위배되는 이런 광기와 그 산물들을 자신의 공화국에서 추방하고자 했죠ㅡ이게 플라톤의 그 유명한 <시인추방론>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이런 문학이란 게 궁극적으론 세계를 구성하는 이데아의 모방물에 불과한, 즉 원본에 대한 모작에 불과한 찌꺼기라는 점을 들면서 그 무의함을 역설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 문학이란 이성적 질서를 위해는 감정의 광기라는 점에서 본디 문란한 것이고, 게다가 이들이 말하는 질서란 것도 원래 존재하는 철학적 이데아의 모상이라는 점에서, 굳이 원작을 두고 불완전한 모작을 배울 필요가 없는 불필요함이란 결론에 도달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플라톤을 스승을 모신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의 길을 밟는 듯하면서도 전혀 다른 방향으로 길을 냈지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문학을 하는 이유가 <따라하기>에 쾌감(he'don)을 느끼지 때문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의 시론에서 세워지는 하나의 공리이고요, 모든 논의를 이를 전제로 해서 진행됩니다. 그리고 즉흥적인 창작, 서사시, 풍자극 등의 여러 가지 발전과정을 거치면서, 마침내는 희극과 비극으로 양분되는 현재의 큰 틀에 도달하기 되었다고 설명하죠. 여기서 이 두 극의 공통점은, 모두 <언어(logos)>를 극대화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했다는 것입니다.4 그에 따르자면 이런 발전은 자연의 그 고유의 본성(te'n haute's phusin)을 찾는 일종의 진화론적 과정으로 이해되는데, 이는 마치 그가 철학에서 <목적인(因)>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처럼, 문학에서도 그런 목적론적 관점을 채택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ㅡ뒤에서 추가적으로 말하겠지만, 굉장히 계몽주의적인 입장을 취합니다.

...예컨대 호메로스는 우리보다 낫게, 클레오폰은 우리와 비슷하게, 그리고 파로디아를 처음 만들어낸 타소스 출신의 헤게몬과『데일라아다』의 저자 니코카레스는 우리보다 못하게 인물을 재현했다. (……) 바로 이 차이에 따라 비극과 희극이 나누어진다. 희극은 보통 사람들보다 못나게, 비극은 더 낫게 재현하려고 한다.5」

...핵심은, 재현을 뜻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미메시스란 것은, 현실과 비슷하게 모방함과 동시에, 결코 현실과 동치되지 않는 편집을 필요로 하는 요소란 것입니다. 그러니까 <더 아름답게 그린다(kallious graphousi)>라여야 비극인 셈이지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훌륭한 초상화가에 빗대어 표현합니다.「비극은 우리보다 나은 인물의 재현이므로 훌륭한 초상화가들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그들은 고유의 형상을 재현하여 실물과 유사하게 그리되 더 아름답게 그린다. 마찬가지로 시인은 화를 잘 내는 사람이나 무심한 사람 또는 그와 유사한 성격상의 특징을 가진 사람들을 재현할 때 그런 특징을 갖되 더 품격 있는 인물로 그려야 한다.」따라서 미메시스란 것은 재현적이면서도 동시에 과장되어야만 하는, 서로 상충될 것처럼 보이는 요소들의 적절한 종합입니다.

  그럼 미메시스란 게 왜 그런 속성을 지녀야만 하는지에 대한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희극과 달리(다들 아시겠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희극에서 다룬 부분은 유실되었고, 현재는 비극에 대한 얘기들만 전해집니다) 비극에서의 인물이란 일반인들보다 더 고상하고 고귀한(spoudaioi) 존재들의 재현입니다. 그리고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그가 봤을 때 좋은 비극이란 이런 고귀한 존재가 그 자신의 악덕이나 악행 때문이 아닌 어떤 과오 때문에 불행에 빠지게 함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연민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극이지요. 그런데 왜? 단순히 관객들이 그런 것을 좋아해서? 하지만 그는 인간이 본성이란 재현하는 것에서 쾌락을 느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세상에 좋은 점만 갖춘 인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인물을 보는 관객은, 그게 재현이라고 여겨지면서도 동시에 재현이 아닌 허구적이란 걸 인식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면 쾌락을 느낌과 동시에 느끼지 않아야 합니다. 네, 그렇습니다. 이건 모순입니다.

  여기서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결국 허구적인 등장인물을 삶을, 곧 자신이 살아야만 하는 인간의 삶이라고 여기게 만드는, 일종의 당위적 자기동일화가 벌어져야만 합니다. 그리고 극이 끝나고 현실로 돌아간 그가, 진짜 극중의 인물처럼 살게 된다면, 그 순간 현실이 극이 되어버리게 되지요ㅡ여기서 미메시스는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허물어버리는 본성을 가진 게 됩니다. 마치 재현에서 느껴지는 쾌감을 활용해서, 인간을 허구적 무언가로 데려가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대목이지 않습니까? 이런 아리스토텔레스의 구상은 그가 말한 <카타르시스(katharsis)>에 대한 분석에서 더욱 적나라케 드러납니다.

  비극은 그 끝까지 완결되어 있고 일정한 크기를 갖는 고귀한 행동을 재현함으로서, 작품을 구성하는 부분에 따라 각기 다양한 종류의 양념으로 맛을 낸 언어를 수단으로 삼는다. 그리고 비극의 재현은 이야기가 아닌 극의 등장인물에 의해 이루어지며 연민과 두려움을 재현함으로써 그러한 종류의 감정에 대한 카타르시스를 실현한다.6

  아리스토텔레스는 카타르시스가 곧 비극의 본질(ousia)라고 주장합니다. katharsis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정화>라는 뜻을 가지는 말인데, 그에 따르자면 비극은 연민(eleos)와 두려움(phodos)를 불러일으킴으로써 이런 정화를 단행하지요. 그럼 도대체가 연민과 두려움을 느꼈는데 왜 내 안에서 무언가 씻겨 내려간 것 같은 정화의 감정을 느낀단 말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재현의 방식을 통해 무엇을 청소하려고 하는가? 우선 저 연민과 두려움이란 게 뭔지 부터 좀 알아봐야합니다. 그의 또 다른 저서인『수사학』에는 두려움이란 <고통과 무질서(lupe' tis kai tarakhe')>로, 연민은 간접적으로 나타나는 두려움이 안겨 주는 고통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7 우선 두려움에 대해서 집중해보자면, 여기에 대한 주된 정서는 무질서로부터 비롯된 고통입니다. 물론 질서 속에서 자신이 고통을 당할 것을 확실히 예감하고서 받는 고통도 존재하겠지만, 그럼에도 후자의 고통은 대비나 체념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고통을 어느 정도 격감시킬 가능성이 있는 고통으로 이해됩니다. 따라서 그 정도를 비교해보자면 무질서로부터 비롯된 고통이 더욱 크다는 말이죠(적어도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사실 무질서에 대한 그의 인식은 이 텍스트『시학』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비극의 짜임새와 연결성에 대해서 논하는 부분(8장)에서 잘 짜인 비극이란 사건 하나하나가 인과적 연결성을 가지며 주제의식으로 이어지지만, 막상 현실은 그런 필연성 없는 우연에 좌우됨을 인정합니다.8 그러면서 모름지기 잘 짜인 비극이란 단 하나의 겉도는 사건도 없는, 수많은 연결고리들 중에 하나만 빼도 모든 구조가 무너질 정도로 촘촘하게 짜여있어야 함을 역설하죠.「그러므로 다른 재현 예술에 있어서 재현의 통일성은 대상의 통일성에서 비롯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행동의 재현인 줄거리도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단일한 행동을 재현한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각각의 부분들을 구성하는 사건들은 그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옮겨 놓거나 빼게 되면 전체가 뒤죽박죽이 되게끔 구성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덧붙이거나 빼버려도 뚜렷한 결과가 생기지 않는다면 그 부분은 전체 중의 부분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9」

  현실이란 질서도 없고요, 필연성도, 아니 어쩔 때는 확률적 개연성마저도 모호한 것처럼 만들어버리곤 합니다. 따라서 어제 제가 한 일과 오늘 하나는 일 사이에 어떠한 연결고리도 찾지 못할 때가 많지요. 어렸을 때 그림을 배웠고, 고등학교 때는 입시공부하다 지겨워져 게임으로 소일했고, 지금은 소설을 쓰고…… 마치 앞으로의 인생이 하나의 귀결점을 찾지 못한 채 이거 조금 저거 조금, 찔끔찔끔 겉만 훑다가 다 끝나버릴 것만 같은 허무함에 잠기기도 합니다ㅡ매순간을 즐기라는 <카르페디엠>의 교훈적인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말처럼 들릴 따름입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현실에 부합하는 형식을, 수없이 혼란스럽고 특수한 것(kath'hekaston)들의 순서대로 나열한 <연대기> 형식의 역사라고 봤죠. 그의 시선에서 역사란 필연적 법칙성을 상정할 수 없는 혼란의 도가니요, 진흙탕입니다. 따라서 역사로부터 법칙성을 도출하는 것이 아닌, 철학(여기는 정치학이나 윤리학 등의 학문이 총망라됩니다)으로서 나아갈 역사를 만들어내는 정치공학적 발상을 하는 쪽으로 나아가죠—이런 점에서 그는 플라톤의 후예입니다.10

  운문으로 된 이야기를 통해 재현하는 기술에 대해 말해 보자. 명백한 것은 비극에서처럼 그 줄거리는 드라마 형태로 구성되어야 하며 처음과 중간 그리고 끝과 더불어 하나의 단일한 전체를 이루면서 그 해결에까지 이르는 하나의 단일한 행동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야만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단일한 생명체와 흡사하게 줄거리는 그 고유의 쾌감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 구조가 연대기적 역사의 그것과 비슷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연대기적 역사는 필연적으로 하나의 단일한 행동이 아니라 어떤 한 시기와 그 시기에 일어난 모든 사건들과 관계될 수도 있고, 단 한 사람 또는 여러 사람과 관계될 수 있으며, 서로 간에는 우연적인 관계를 유지한다. 왜냐하면 살라미스 해전과 시켈리아 섬에서 카르케돈인들과의 전쟁은 같은 시기에 일어났지만 결코 같은 결말을 향해 나아가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시기적으로 한 사건이 다른 사건과 전후하여 일어나는 경우에도 하나의 단일한 결말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11

  이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이해가 되시는지요? 그는 인간의 이 지점을 정확히 찌르고 있습니다. 이 특수한 것들의 난립인 혼란한 세상 속에서 우리들은 서로 연결되지 않는 무질서함에 통째로 던져진 상태이며, 이 안에서의 몇 줄기 이음새를, 혹은 그마저도 이어져있다고 우리가 일방적으로 믿고 있는 건지도 모르는 것들을 찾아보려 애씁니다. 그래서 내 인생이 어디론가 의미 있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막연한 <섭리> 같은 것에 기대고픈 종교적 충동에 시달리기도 하죠. 이런 세계 속에서 사람들은 당장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는 불안증과 함께, 그런 불안들을 이겨내는 것에 아무런 의미가 없을 지도 모른다는 허무주의의 망령에 시달립니다. 하지만 비극은 무질서한 현실과 달리 모든 장면들이 하나의 주제의식이라는, 의미를 향해 이어진 작은 의미들의 연쇄로 이루어져 있고, 또한 더 나아가서 그런 형식이어야만 하는 것입니다(작은 부분 모두가 통일성의 의미로 빛나야 합니다). 그 연쇄의 이름이 필연성(ex anank&egrave;s)이고 개연성(&egrave;h&ocirc;s epi to polu)입니다. 특별히 다다이즘dadaism을 지향하는 게 아니고서야, 아니 그런 다다이즘마저도 그 자체의 형식 속에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바, 비극 속의 세상은 개연적이고 보편적(katholou)입니다.「바로 이런 까닭에 시는 연대기보다 더 철학적이고 더 고귀하다. 시는 보편적인 것을 다루는 데 반해 연대기는 특수한 것을 다루기 때문이다. <보편>이라 함은 어떤 유형의 인물이 개연성이나 필연성에 따라 하는 말이나 행동의 유형을 말한다.12」

  이런 맥락에서 <쾌감을 동반한 일종의 정화와 안도감(tina katharsin kai kouphizesthai meth'he'done's)>을 뜻하는 카타르시스란, 지극히 부조리한 현실과 달리 질서가 세워진 비극적 세계에서 느끼는 불안감 해소 내지 대리만족이며, 더 나아가서는 현실을 그런 식으로 축조하기 위한 윤리적 당위성을 결단하는 데서 오는 정화의식입니다. 결국 미메시스란 허구로부터 말미암은 서사로서 현실을 재구축하는 도구인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그의 비극론은 윤리성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지요. 윤리적 관점에서 봤을 때 세상은 미덕(arete')과 악덕(kakia)의 대립이며13, 비극은 이 두 인물의 극한대립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윤리적 목적에 효과적인 도구입니다.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가 고귀한 인물을 재현하는 것이라고 봤던 비극에서의 저 <고귀한 인물>이란 건 윤리적 덕성을 가진 자에 다름이 아니며, 이 인물들은 관객들에게 감동과 연민의 감정으로서 올바른 품격과 성격(e'the)과 사상(dianoia)을 설득시키고, 더 나아가서는 그것들의 담지자가 될 수 있게 만들어야만 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미메시스 자체의 본성 속에 내포된 모순이 존재합니다. 미메시스란 기본적으로 현실과 비슷한 재현이라는 점에서 1차적인 공감을 얻고, 그걸 바탕으로 미메시스의 허구를 현실인 것처럼 유도하는 2차적 기능을 합니다. 이 1차적 기능과 2차적 기능의 종합이란 어디까지나 당위가 현실에 실현될 때 성립하는 것인바, 결론적으로 관객이 <고귀한 인물>을 내면화했을 때만 유효해지지요. 흥미로운 건 여기서 어떤 식으로든 1차적 공감유도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인데, 따라서 지독한 현실성에 집중하다보면, 아이러닉하게도 그런 세계 안에서의 <고귀함>을 찾는 게 난감해지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꿈도 희망도 없는 세상에서 부질없는 대안을 말하는 게, 그게 오히려 희망고문을 하는 것은 아닐까? 미덕은 기만이 아닐까? 의구심은 끝도 없습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에는 이런 미메시스의 두 얼굴을 각기 존중하는 태도를 보입니다ㅡ둘 중에 하나만 탈락해도 미메시스는 설득력을 잃습니다. 동시대 내에서 <있는 그대로의 인간>을 잘 그려낸 작가를 에우리피데스로, 반대로 <있어야만 대로의 인간>을 잘 표현한 작가에 소포클레스를 뽑고 있지요.14 물론 중점은 단연 소포클레스에 찍힙니다. 서두에서부터 말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윤리적인 목적인으로서 구성된 세상을 바라보며, 역사도 이런 식으로 축조되는 것이라 믿는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왜 이런 고귀함을 학습하는 계몽적 도구가, 하필이면 비극이어야만 하는가? 희극이라는 풍자와 웃음을 통해서 전달이 불가능한가? 희극의 경우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이 소실되었으니 그 입장을 제대로 알 수 없지만, 비극의 경우엔 추리해볼 수 있습니다. 가령 아리스토텔레스는 연민에 대해 <연민은 부당하게 불행을 겪는 사람에게 향하는 것>15이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좋은 비극 역시도 고귀한 사람이 악덕이 아닌 필치 못할 불행으로 인해 파탄에 빠지는 것으로 바라봅니다. 가령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는 왕비가 자기 어머니인줄 모르고 근친상간을 범하니, 자신의 악덕이라기보다는 운명의 무지에 대한 대가를 치릅니다. 여기서 신의 장난이나 무지와 같은 요소들은, 그 자체로 현실성을 구성하는 특수한 요소들입니다. 이는 그 자체로 현실의 혼란을 구성하는 핵심이자, 동시에 관객들에게 불안을 주는 것들이지요ㅡ착한 사람도 당하는 교통사고의 부조리함이란……. 이런 점에서 오이디푸스의 파멸이란, 그로 말미암아 관객들에게 극도의 현실감을 부여하는 장치입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근친상간충동 같은 데에 집중했지만, 제가 봤을 때 아리스토텔레스 관점에서 오이디푸스의 핵심은, 혼란하고 우연한 손길이 규율을 지켜온 고귀한 자의 인생을 파탄으로 끌고 간다는 얄궂은 그 자체에 있습니다. 우연들이 우연하게도 겹친 게 운명이 됩니다. 우연이 곧 비극입니다. [※이건 여담이지만, 희극은 정반대로 작동할 것입니다.]

  여기서 관객은, 마치 개츠비를 두고 위대하다고 표현하는 것처럼, 고귀한 자가 운명에 의해 파멸했다는 점에서 역설적인 인간적 자부심을 느끼고자 합니다. 추락하는 오이디푸스는 수많은 운명의 장난에 난도질당한 인간들의 대표이며, 따라서 관객들은 그를 위대한 패배자로서 기억하고자 합니다. 일종의 추모의식인 것입니다. 그럼 아리스토텔레스는 왜 연민과 공감이라는 패배자의 정서로서 윤리의 호소를 말하고자 했는가? 사실 그건 너무도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가령 플라톤의『국가』에서 트라쉬마코스는 법률이나 정의란 건 궁극적으론 <강자의 이득>이라고 단칼에 정의한바 있습니다. 이에 맞서서 소크라테스는 윤리의 본질을 변호하려고 애쓰는데, 그럼에도 독자들의 뇌리에 각인되는 건 트라쉬마코스의 현실주의일 것입니다ㅡ왜냐하면 대부분의 인간은 현실을 바꾸고자 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 적응하고자 하니까(진화론의 아이러니). 여기서 윤리는 약자들에게 잔혹해집니다. 그 고귀함은 당신의 삶에 그 어떠한 실리도 약속하지 않습니다. 존엄한 명예를 제공해주지도 않을 겁니다. 그것은 도리어 당신의 삶을 빈약하게 만들 것이며, 더러는 어쩔 수 없는 타협에서 올 죄책감과 자기혐오감만을 심어줄 겁니다. 복종하는 주체라는 점에서 아이히만처럼 일종의 자살을 설계하게 될지도 모르며, 그런 게 아니더라도 세계를 구성하는 권력과 이기심과 탐욕들은, 그런 고귀한 자를 이용하고 짓밟고 타락시키고자 합니다. 여기에 대한 진실들은, 저보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이 더 잘 알고 있으리라 봅니다.

  따라서 윤리적인 자인 승리란, 미메시스의 1차적 요구인 현실성을 깨버리는 판타지가 됩니다. 따라서 그런 장밋빛 드라마에 관객들은 결코 설득되지 않지요ㅡ이런 점에서 현대사회의 막장드라마는, 냉소주의의 극단입니다. 또한 그런 의미에서 희극은 윤리적 목적을 위해 사용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대안은? 파멸과 패배를, 영웅적인 것으로 포장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파탄은 현실적이지만, 그 위에 명예로움을 덧씌우는 것은 허구적인 창조라고 볼 수 있죠. 여기서 관객들의 연민과 감동이란, 동일시여기는 비극적 인물에 대한 것임과 동시에 자기 자신에 대한 위로가 됩니다. 결국 카타르시스의 정화란, 영웅적인 패배에서 오는 비장미에 근원을 둔 미학적 합리화입니다.

고현로님의 댓글

profile_image 고현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하하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재밌네요.
문학을 하려는 이유를 플라톤은 광기의 탓으로 보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따라하기(재현)의 쾌감으로 정의하고... 무질서에 통째로 던져진 삶은 섭리에 의존하려는 종교적 충동이 필연이고 그 불안증은 허무주의를 양산한다는 등의 이야기...우연이 우연하게 겹치는 게 비극이며 우연이 곧 비극이다라...
하하하 뜻도 모르고 암기만 달달하던 시절이 떠오릅니다. 지금에서야 자기필요성에 따라 찬찬히 들여다보고 이해하려는 것을 보니까 저도 어지간히 돌머리였나 봅니다. 고맙습니다.^^

활연님의 댓글

profile_image 활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장석남



  1

찌르라기떼가 왔다
쌀 씻어 안치는 소리처럼 우는
검은 새떼들
찌르라기떼가 몰고 온 봄 하늘은
햇빛 속인데도 저물었다
저문 하늘을 업고 제 울음 속을 떠도는
찌르라기 속에
환한 봉분이 하나 보인다.


  2
 
누군가 찌르라기 울음 속에 누워 있단 말인가
봄 햇빛이 너무 뻑뻑해
오래 생각할 수 없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나는 저 새떼들이 나를 메고 어디론가 가리라,
저 햇빛 속인데도 캄캄한 세월 넘어 자기 울음 가파른
어느 기슭엔가로 데리고 가리라는 것을 안다
찌르라기떼 가고 마음엔 늘
누군가 쌀을 안친다
아무도 없는데
아궁이 앞이 환하다.
 

이 시는 속을 들여다보기 쉽지 않지요.

"개똥지빠귀가 아니라 찌르라기 떼지. 1980년 광주를 노래한 시인데 그렇게 읽는 이는 없는 거 같고, 쌀 씻어 안치는 소리와 찌르라기 떼를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지. 쌀 씻어 안치는 소리를 들으며 바라보는 찌르라기 떼라고 하면 큰 무리가 없을 거야. 그건 내 기억의 일부야. 새떼의 울음소리와 쌀 씻는 소리의 오버랩이 그런 문장을 낳았지. 어린 시절 늘 그 새떼를 쫓아다니며 덫을 놓고 잡아 구워 먹기도 했는데 추운 저녁에 집에 가면 어머니가 밥을 안치곤 했지. 그 이미지가 광주의 비극적 어머리를 생각나게 했고....." 장석남, 이기인과 인터뷰 중. 

"시를 계속 쓰게 하는 원동력이 있다면 시라는 것에는 어떤 파동이 있어요. 그걸 느끼는 것이지. 그만두었다가도 다시 들여다보면 시 쓰는 행위 속에 나타나는 파동이 즐거워. 그 자체로 즐거워. 나이가 들수록 놀리적 측면에서 시의 유용성을 찾게 돼. 읽는 것에서도 놀이적 측면이 잦아지고. 읽어서 더 복잡해지는 시 말고 마음이 상쾌하고 후련해지는 시를 눈여겨보게 되지." - 장석남.

어떻게 보면 장석남은 고전이 되어 간다는 생각도 드네요. 1965년 덕적도 출생.
'대통령이 덮은 자장면 그릇' 여기선 장석남의 정치성이 엿보이는 듯. 먹고 나면 더러운 얼룩이 되는 걸 덮은 권력.
고현로님
달의지구님
            하얀 저녁 되삼. 나는 서점에나 가볼 참.

활연님의 댓글

profile_image 활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어묵탕 닭발 오이
냉수 한컵 소주
시집 아홉권 산문 한권 쌓아두고 읽고 있음.
딱 한잔 가능한데
올테면 와여

Total 22,866건 236 페이지
창작시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추천 날짜
6416 광나루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54 0 01-27
6415 세상 관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29 0 01-27
6414 용담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50 0 01-27
6413
대리 인생 댓글+ 19
김선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223 0 01-27
6412
바다 댓글+ 1
윤바다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48 0 01-26
6411
얼음 물고기 댓글+ 9
활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164 0 01-27
6410 김태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880 0 01-27
6409
겨울비 댓글+ 4
바람예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70 0 01-27
6408 박정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49 0 01-27
6407
통증 댓글+ 2
가자1234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53 0 01-27
6406
새벽시간 댓글+ 1
초보운전대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64 0 01-27
6405 금경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49 0 01-27
6404 활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271 0 01-27
6403
포장 마차 댓글+ 4
k담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59 0 01-27
6402 신광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11 0 01-26
6401 노을피아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41 0 01-26
6400 초보운전대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56 0 01-26
6399 세상 관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49 0 01-26
6398
눈 쌓인 날에 댓글+ 5
오종식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832 0 01-26
6397 새벽그리움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62 0 01-26
6396 세상 관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44 0 01-26
6395
꿈나무들 댓글+ 1
윤희승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50 0 01-26
6394 은영숙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834 0 01-26
6393 김태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880 0 01-26
6392 k담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66 0 01-26
6391
점심 댓글+ 5
노정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59 0 01-26
6390
늦은 일기 댓글+ 1
saːmz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09 0 01-26
6389
일상 댓글+ 30
이종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037 0 01-26
6388
빙점의 脫氷 댓글+ 1
쏘우굿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49 0 01-26
6387
나는 더 춥다 댓글+ 6
박정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70 0 01-26
6386 용담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45 0 01-26
6385
한라봉 댓글+ 6
김태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35 0 01-26
6384 광나루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79 0 01-26
6383 금경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49 0 01-26
열람중
첫밗 댓글+ 12
활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067 0 01-26
6381 페트김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24 0 01-26
6380 바람예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50 0 01-26
6379 맛살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80 0 01-26
6378 saːmz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63 0 01-26
6377 바람예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28 0 01-26
6376
성숙의 비밀 댓글+ 3
원스톤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50 0 01-26
6375 원가1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47 0 01-26
6374 그대로조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58 0 01-25
6373 신광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27 0 01-25
6372 신광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33 0 01-25
6371
꽃이 듣는 말 댓글+ 1
쏘우굿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78 0 01-25
6370 오종식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861 0 01-25
6369 원스톤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49 0 01-25
6368 박정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51 0 01-25
6367
웃음 댓글+ 2
노정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50 0 01-25
6366 시마을동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847 0 01-25
6365
꿈의 후예 댓글+ 1
泉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41 0 01-25
6364 은영숙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76 0 01-25
6363
가상(假想) 댓글+ 18
이장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923 0 01-25
6362
다정(多情) 댓글+ 2
바람예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876 0 01-25
6361
털걸레 댓글+ 1
노을피아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59 0 01-25
6360
사랑 댓글+ 2
쏘우굿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805 0 01-25
6359 광나루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26 0 01-25
6358 용담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51 0 01-25
6357 원스톤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51 0 01-25
6356 새벽그리움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28 0 01-25
6355 saːmz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50 0 01-25
6354 石木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53 0 01-25
6353 김태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70 0 01-25
6352 활공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51 0 01-25
6351 香湖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31 0 01-25
6350 바람예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50 0 01-25
6349 맛살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50 0 01-25
6348 saːmz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95 0 01-25
6347 파오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56 0 01-25
게시물 검색

 


  • 시와 그리움이 있는 마을
  • (07328) 서울시 영등포구 여의나루로 60 여의도우체국 사서함 645호
  • 관리자이메일 feelpoem@gmail.com
Copyright by FEELPOEM 2001.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