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란에 새 발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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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란에 새 발자국
꽃물은 어디서 오는가
마른 이엉 친친 감은 애벌레 실눈 뜨고 보면 여전히 누런 감옥
수천 미터 상공 쇠기러기 쪼아대는 얼음의 눈
뒤뜰 장독대 함박함박 앉히고
벙거지 씌운 뒤란에 새 발자국
배 홀쭉한 감나무가 무른 가지 늘어뜨리고 휘저으면
눈사람 눈썹에 쌓이는 희디흰 발소리
한 손 두 손 물감을 풀어 저으면 흰 적막이 옷고름 푼다
성근 들창에 번지는 어린 누이
손톱 싸매 발그레 화톳불 틘다
벼랑에 겨우내 비끄러맨 무른 피 짜내 모아쥐고
두더지 입술에 묻혀 굽은 발등 적신다
꽃물은 깜깜한 땅굴을 누비고 엮은 바늘 발바닥
댓글목록
활연님의 댓글

물의 베개
박성우
오지 않는 잠을 부르러 강가로 나가
물도 베개를 베고 잔다는 것을 안다
물이 베고 잠든 베갯머리에는
오종종 모인 마을이 수놓아져 있다
낮에는 그저 강물이나 흘려보내는
심드렁한 마을이었다가
수묵을 치는 어둠이 번지면 기꺼이
뒤척이는 강물의 베개가 되어주는 마을,
물이 베고 잠든 베갯머리에는
무너진 돌탑과 뿌리만 남은 당산나무와
새끼를 친 암소의 울음소리와
깜빡깜빡 잠을 놓치는 가로등과
물머리집 할머니의 불 꺼진 방이 있다
물이 새근새근 잠든 베갯머리에는
강물이 꾸는 꿈을 궁리하다 잠을 놓친 사내가
강가로 나가고 없는 빈집도 한 땀,
물의 베개에 수놓아져 있다
박성우
1971년 전북 정읍 출생. 200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시 등
단. 200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동시 등단. 시집 『거미』 『가뜬한 잠』이 있음. 신동엽창작상 등 수상.
안세빈님의 댓글

윗시 아랫시 잘 봤습니다.
거미는 스스로 제 목에 줄을 감지 않는다.
활연님의 댓글

딱딱한 글을 남발하다가 그냥 서정시 하나 써보고 싶었지요.
날씨가 추운데 따습게 지내십시오.
새들의 본적
김경선
새들의 자유는 과장되었다
평생 허공을 날다가
죽어서 귀가 열리는 새들
죽음으로
비로소 자유를 얻는다
자유로운 날개는 속박이었다
허공의 길,
한 번도 그 길을 벗어난 적이 없는
새들의 무덤은 하늘이다
그 아래 우리의 무덤이 있다
땅에 닿지 못하는
새들의 자유는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바람을 등에 업고 바람이 되어 살다가
비로소 허공이 된
새를 받아 안은 하늘무덤을 바라본다
그들의 마지막 유언도
그들을 따라 날아갈 날개도 나에겐 없다
무덤의 문고리를 잡아당기던
한 무리의 새 떼가
서쪽하늘로 사라진다
월간『우리詩』
고현로님의 댓글

완전 순우리말 사전 시...
세 치 혀를 내두르다가 몇 행은 그대로 차용하기로 마음먹었으니까
나중에 도용이 발견되어도 모른 척 해주쌤!!! ㅋ
활연님의 댓글의 댓글

자주 애용해 주세요 쓸모가 없을 테니
시는 동족 안에 머물되 벗어나는 거.
그 낮달 찾기가 힘들다는 거.
혀는 젖꽃판에나 두고 내두르는 거.
늘 굿하는 맘으로 굿.
달의지구님의 댓글

꽃물,이 무엔지? 사전 찾아보고 았았네요.
매우 중요한 단계나 대목 가운데서도 가장 아슬아슬한 순간. 등등...
부족한 나의 언어로 뒤란의 새 발자국,이 보이지 않네요.
즐거운 하루 되시길...
활연님의 댓글의 댓글

이런 스탈은 내 취향과 거리가 있음.
이미 다 해먹은 작자들이 너무 많음.
발자국이니, 그늘이니, 살그머니 치명을 숨겨두었다가
돌담 너머에서 확~ 나타나는 그런
불구덩이에서 머릴 내미는 자라, 자라자
그런 류는 셀 수 없이 많음.
요즘은 추상보다 더 깊이 가고 있으므로
개발바닥 땀나도 행방을 찾기 어렵다는 거,
오늘은 낮달이 밝소.
쏘우굿님의 댓글

남쪽 서해안에 눈이 많이 왔나 봅니다
여기 경기도엔 눈 같은 것 살짝 보이다
쨍쨍한 가운데 날씨가 매섭게도 춥습니다
건강 하세요~
시인님~~
활연님의 댓글의 댓글

남쪽은 모르겠고 이곳은 화창한데
쌀쌀하군요. 상상은 만주도 가고 홍콩도 가고 그러지요.
늘 따스운 날 지으십시오.
박성우님의 댓글

아버지 귀향 하시면서 고향 집 개량을 하셨는데.....
아쉽게도 뒤란에 있던 감나무를 자르셨어요~
아~
두고두고 아쉬운~~
활연님의 댓글의 댓글

감나무는 허공이 가진 젖이다
젖을 말려 오래 씹으면 떫은맛 대신 단맛이 난다.
뒤란뒤란, 두란두란,
서정적 메타포로 오시는 박성우님
시를 무척 잘 쓰는 이름들.
활연님의 댓글

수런거리는 뒤란
문태준
山竹 사이에 앉아 장닭이 웁니다
묵은 독에서 흘러나오는 그 소리 애처롭습니다
구들장 같은 구름들은 이 저녁 족보만큼 길고 두텁습니다
누가 바람을 빚어낼까요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산죽의 뒷머리를 긁습니다
산죽도 내 마음도 소란해졌습니다
바람이 잦으면 산죽도 사람처럼 둥글게 등이 굽어질까요
어둠이, 흔들리는 댓잎 뒷꿈치에 별을 하나 박아주었습니다
혀
문태준
잠자다 깬 새벽에
아픈 어머니 생각이
절박하다
내 어릴 적
눈에 검불이 들어갔을 때
찬물로 입을 헹궈
내 눈동자를
내 혼을
가장 부드러운 살로
혀로
핥아주시던
붉은 아궁이 앞에서
조속조속 졸 때에도
구들에서 굴뚝까지
당신의 눈에
불이 지나가고
칠석이면
두 손으로 곱게 빌던
그 돌부처가
이제는 당신의 눈동자로
들어앉아서
어느 생애에
내가 당신에게
목숨을 받지 않아서
무정한 참빛이라도 될까
어느 생애에야
내 혀가
그 돌 같은
눈동자를 다 쓸어낼까
목을 빼고 천천히
울고, 울어서
젖은 아침
묵언(默言)
문태준
절마당에 모란이 화사히 피어나고 있었다
누가 저 꽃의 문을 열고 있나
꽃이 꽃잎을 여는 것은 묵언
피어나는 꽃잎에 아침 나절 내내 비가 들이치고 있었다
말하려는 순간 혀를 끊는
비
한 호흡
문태준
꽃이 피고 지는 그 사이를
한 호흡이라 부르자
제 몸을 울려 꽃을 피워내고
피어난 꽃은 한번 더 울려
꽃잎을 떨어뜨려버리는 그 사이를
한 호흡이라 부르자
꽃나무에게도 뻘처럼 펼쳐진 허파가 있어
썰물이 왔다가 가버리는 한 호흡
바람에 차르르 키를 한번 흔들어 보이는 한 호흡
예순 갑자를 돌아나온 아버지처럼
그 홍역 같은 삶을 한 호흡이라 부르자
회고적인
문태준
가령 사람들이 변을 보려 묻어둔 단지, 구더기들, 똥장군들.
그런 것들 옆에 퍼질러앉은 저 소 좀 봐,
배 쪽으로 느린 몸을 몰고 가면 되새김질로 살아나는 소리들.
쟁기질하는 소리, 흙들이 마른 몸을 뒤집는,
워, 워, 검은 터널으 ㄹ빠져나오느라 주인이 길 끝에서 당기는 소리.
원통의 굴뚝에서 텅 빈 마당으로 밀물지는 쇠죽 연기.
그러나 不歸, 不歸! 시간은 사그라드는 잿더미에 묻어둔 감자 같은 것.
족제비가 낯선 자를 경계하는 빈, 빈집에 들어서면
녹슨 작두에 무언가 올리고 싶은, 도시 회고적인 저 손 좀 봐.
중심이라고 믿었던 게 어느 날
문태준
못자리 무논에 산그림자를 데리고 들어가는 물처럼
한 사람이 그리운 날 있으니
게눈처럼, 봄나무에 새순이 올라오는 것 같은 오후
자목련을 넋 놓고 바라본다
우리가 믿었던 중심은 사실 중심이 아니었을지도
저 수많은 작고 여린 순들이 봄나무에게 중심이듯
환약처럼 뭉친 것만이 중심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나의 그리움이 누구 하나를 그리워하는 그리움이 아닌지 모른다
물빛처럼 평등한 옛날 얼굴들이
꽃나무를 보는 오후에
나를 눈물나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믐밤 흙길을 혼자 걸어갈 때 어둠의 중심은 모두 평등하듯
어느 하나의 물이 산그림자를 무논으로 끌고 갈 수 없듯이
`
문정완님의 댓글

뒤란은 참 많은 사건이 일어나는 곳이죠 벌레들의 생존이야기 장독대에 엄마가 정한수 물을 올려놓은 이야기 아버지가 장작을 패며 굵은 땀방울을 흘렸던 이야기 남모르게 엄마가 눈시울을 붉혔던 이야기 뒤란은, 다녀간 새 발자국처럼 많은 삶의이야기들이 있는 곳
저의 집 뒤란에는 석류나무와 앵두나무가 있었는데 ...활의 시를 읽으며 그 빨간 석류가 문득 그리워집니다
머물다 갑니다^^
활연님의 댓글

내 옛집엔 뒤란이 거의 없지요. 오래전 돌담이 있었고
블록담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옆집으로 편입되어 흔적이 없지요.
생가는 그리움일 것인데, 그것이 형체가 없는 것처럼.
오랜만에 염불 좀 외워보았습니다.
늘 칼필하십시오.
Sunny님의 댓글

뒤뜰 장독대 함박함박 앉히고
벙거지 씌운 뒤란에 새 발자국 .때문에 어릴적 살던 집 뒤안을 훌쩍 다녀왔고요
뒤란길이 좋아 지하도까지 따라 내려와 몇 마디 남기고 갑니다.
참고로 드릴 말씀은
딱딱한 길 말고 제가 머물 수 있는 서정의 길도 종종 닦아 주세요~
활연님의 댓글

너무 편식하시면 앙 되요. 세상에 시가 내 입맛에 맞는 것만 있겠어요.
내가 좋아하지 않는 세계도 들여다 보는 것,
내가 알지 못 하는 세계도 더러 궁금한 것,
그러다 자기 취향을 과식해도 뭐랄 수 없지만요.
시를 쓴다면 누구나 자기 色을 찾겠지만,
우리는 모르는 곳에서 무언가 얻기도 하니까요.
'서정'은 시의 가장 기본이 되는 등뼈이지만,
뼈만 있다면 그것 또한 해골의 무늬.
이리저리 즐기시길 바랄게요.
춥네요. 햇빛 말끔히 닦아 환한 날 지으세요.
Sunny님의 댓글의 댓글

건더기가 너무 많아서 소화 못하는 답답함 모르시죠?
ㅎ 세월 더 흐르면 꿀꺽할 날도 오겠지요~
굿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