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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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천국
박주가리 한 올 착지한다
가슴골 들추자 제9번 방이 열린다
열쇠는 불을 켠다. 밀물일 때 가장 추운
중심이 가을 파동에 달라붙는다
사슴뿔을 자른다. 단면에 태동하는 물소리
유리 안에 든 유리들
컵을 자꾸 들이킨다
제6번 방이 켜진다
여분을 향해서 방심을 드러낸다
전봇대에 오줌을 누고 긴 코로 다음 전봇대를 겨눈다
자꾸 없어지는 발,
제3번 방이 열린다. 네 자리 비밀이 자라고
잠들이 늘려 있다
제3번 방 다락이 켜진다
창문으로 달아나는 부피들
당신을 밀고 들어간 문
다락에 얹어둔 당신의 회전 반경
백스페이스가 지운다. 뒷발이 계면쩍게 홀가분하다
세 번 입술을 손바닥으로 옮긴 당신
여섯 번 손바닥을 놓친 당신
아홉을 확신한 당신. 확신을 발음한 우리들
손바닥에 부러진 박수들
평발에 휘어져 달라붙은
당신을 누빈다
바늘이 핏줄로 스민다
댓글목록
활연님의 댓글

한밤의 멍키스패너
이용한
여자는 식탁 위에서 자꾸만 늙어갔다
오래된 허공을 걸어왔으니
저녁은 발목이 아픈 여자의 형식이 되었다
서랍에 넣어야 할 멍키스패너를 설거지통에 던져버리고
입술에서 발밑까지 흘러내린 악몽
왼쪽 어깨를 들썩이며 여자는 몇 번이나 고쳐 앉았다
인생은 어디에나 있어요
하지만 물이 새는 집에서 살 순 없죠
사방에 흩어진 페이지들
대체로 그런 동정은 접시에 담을 수도 없다
그녀가 물려받은 거라곤 쓸데없는 책들과 슬픔
어쩔 수 없는 멍키스패너
물끄러미 바닥에 앉아서 여기가 바닥이야, 라고 말하는
여자의 등을 아무도 쓸어주지 않는다
맨날 체하고 지랄이야
소화가 되지 않는 저녁에
약도 없이 찬물만 마시다가 여자는 가만히 들썩인다
이유가 없어도 창문은 삐걱대고
7월의 느티나무가 부엌까지 가지를 늘어뜨렸다
살면서 고장 나는 것들은 언제나 고장이 나선 안 되는 것들이다
시들어버린 손목과
고무패킹이 망가진 수도꼭지
언제부턴가 여자는 시집조차 읽지 않는 가장이 되었고
수선할 곳이 많은 엄마가 되었다
인생은 어디에나 있어요
하지만 모두가 떠난 곳에서 기다릴 수는 없죠
세상에 없는 당신
저만치 내려앉은 나뭇잎
한밤의 깊은 공중에 대고 여자는 힘껏 웃었다
시엘06님의 댓글

상징으로 읽어야 할듯, 눈이 어두워 몇번을 읽어보다가,
'방과 천국'이라. 방에 붙여진 번호가 천국은 아닐진데, 그렇다면 반어법.
따뜻한 시선과 위선을 쏘아보는 눈이 교차하는, 새벽 고요를 느끼고 갑니다.
잘 감상했습니다. 활연님 ^^
활연님의 댓글의 댓글

일반적으론 3 -> 6 -> 9 -> 13 -> 16 -> 19...
공대생이라면 이진수로 0! / 1! / 1! 0! / 1! 1! / ...
수학과 등이라면 소수(Prime number)일 때만 박수를 치고 1이나 합성수는 그냥 부르는 방식이다. 1 → 짝 → 짝 → 4 → 짝 → 6 → 짝 → 8 → 9 → 10 → 짝 → 12 → 짝 → 14 → 15 → 16 → 짝 → 18 → 짝 → 20 → 21 → 22 → 짝 → 24...
포병출신이라면 하나! 둘! (짝) 넷! 오! (짝) 칠! 팔! (짝)...
영어과라면 one two 짝 four five 짝 seven eight 짝 ten eleven twelve 짝 fourteen fifteen 짝 seventeen eighteen 짝 twenty twenty-one twenty-two 짝 twenty-four twenty-five 짝 twenty-seven twenty-eight 짝 짝 짝 짝 짝짝 짝 짝 짝짝 짝 짝 짝짝 forty forty-one forty-two 짝 forty-four forty-five 짝 forty-seven forty-eight 짝 fifty fifty-one fifty-two 짝 fifty-four fifty-five 짝 fifty-seven fifty-eight 짝 짝 짝 짝 짝짝 짝 짝 짝짝 짝 짝 짝짝 seventy seventy-one seventy-two 짝 seventy-four seventy-five 짝 seventy-seven seventy-eight 짝 eighty eighty-one eighty-two 짝 eighty-four eighty-five 짝 eighty-seven eighty-eight 짝 짝 짝 짝 짝짝 짝 짝 짝짝 짝 짝 짝짝 one hundred...
369게임의 일반적인 원칙입니다.
이 나열은 발산한다고 봐야겠지요. 무한수열이든 무한급수든 일정한 규칙이 한없이 나열되는데 수렴한다면 그 값은 간단히 요약될 것입니다.
숫자는 '게임'을 의미합니다. 숫자를 말하든 박수를 치든 그것은 단독자들이고 규칙을 생각하고 차례를 기다리다가 실수를 하면 인디언밥~
개임의 원리를 도용한 건, 단순 획일화된 우리도 독립적인 자아를 가진 존재이겠지요. 이 세상이 두 가지 기호에만 반응할 수 있다면 곧바로 천국이겠지요. 실수를 할 수도 있겠지만 인디언밥이나, 벌주를 마시면 될 테니까요.
'가을파동'은 秋波를 우리말로 풀어쓴 것이고요. 어떤 면에서 박수가 아니라 인디언밥이 될 상황을 격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영역 표시를 하면 맴도는 사람도 있겠고, 우리는 규칙이나 질서 속에 있겠지만, 불완전하고 외로운 존재겠지요. 일방적으로 한쪽으로 수렴하고 마는.
그 수렴값에 천국이 있는지 지옥이 있는지, 우주 먼지로 떠돌지 모르겠지만.
이 시의 원리는 게임을 차용한 것이고, 둘러앉은 사람은 번호를 외치거나 박수를 치거나 아주 단순화된 존재이겠지요. 선악 구분이 그렇듯이. 선악이 간명해지면, 천국도 지옥도 그냥 박수일 뿐이겠지요. 발바닥이 다 닳도록 다녀도 결국 인간은 제 몸속에 사는 바늘을 아파할 것이다... 뭐 그런 생각들입니다.
시를 자작해설 하면 김 다 빼지고 맥없이 풀어진 맛이 되는데
다양한 생각을 해도 알레고리가 뭔지?, 의문을 가진 분들이 계실 것 같아, 나름
오래 뚜껑 열어둔 맥주병에서 밍기적거리며 흐르는 거품, 이맛도 저맛도 안 되도록....ㅎ
하듣흰님의 댓글

부라보!
왕유가 환생한 건지, 정지상이 환생한 건지
문득 해동삼첩 시인, 정지상의 '송인'이 확 지나갑니다.
역쉬!!!
활연님의 댓글의 댓글

송인(送人)
雨歇長堤草色多 우헐장제초색다
送君南浦動悲歌 송군남포동비가
大同江水何時盡 대동강수하시진
別淚年年添綠波 별루년년첨록파
비 개인 긴 언덕에는 풀빛이 푸른데
그대를 남포에서 보내며 슬픈 노래 부르네.
대동강 물은 그 언제 다할 것인가,
이별의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에 더하는 것을.
하듣흰님은 역시 예리하십니다. 이 시의 정서는 '이별의 정한' 이런 것일 수도 있어요.
가슴골, 태동, 사슴뼈, 백스페이스, 바늘 이 단어들이 암시하는 것이 그렇지요.
어떤 정서를 환기하기 좋은 건, 누군가를 보내는 것이거나 들이는 것들.
규범과 일탈 사이를 떠도는 것. 흑이냐 백이냐를 선택해 반상에 돌을 놓는 것, 따위이겠는데
결국 타자들(당신들)은 우리들이고 나이겠지요.
왕유나 정지상을 끌어들인 건, 웃자고 하시는 말씀이지만,
단박에 요지를 묶는 솜씨, 인디언밥입니다요. 고맙!!
활연님의 댓글

「위천전가(渭川田家)」 - 위천의 시골집
왕유
斜光照墟落
저녁 햇살 마을을 비추고
窮巷牛羊歸
울퉁불퉁한 길 따라 양 떼 돌아온다.
野老念牧童
노인은 목동이 오나 하고
倚杖候荊扉
지팡이 짚고 문에 기대어 기다린다.
雉雊麥苗秀
꿩 우는 들판에 보리는 잘도 자라는데
蠶眠桑葉稀
누에는 잠들고 뽕잎도 듬성하다.
田夫荷鋤立
농부는 호미를 들고
相見語依依
선 채로 이야기를 나눈다.
卽此羨間逸
이 얼마나 한가로운 풍경인가
悵然歌式微
노래로 답답한 이 마음 어루만진다
「녹시(鹿柴)」
왕유
空山不見人
텅 빈 산 사람도 없고
但聞人語響
어디선가 이야기 소리만 들릴 뿐
返景入深林
깊은 숲으로 비쳐 드는 햇살
復照靑苔上
푸른 이끼 위에 눈부시다.
「전원락(田園樂)」
왕유
桃紅復含宿雨
붉은 복숭아꽃 아직 빗물 머금었고
柳綠更帶春烟
버들잎은 봄 안개 감고 있다.
花落家僮未掃
동자는 아직 떨어진 꽃잎 쓸지 않았고
鶯啼山客猶眠
꾀꼬리 울어도 산사람은 아직도 자고 있다.
「종남별업(終南別業)」 - 종남의 별장
왕유
中歲頗好道
중년에 들어 불도에 이끌리고
晩家南山陲
만년에는 종남산(終南山) 기슭에 별장을 지었다.
興來每獨住
흥이 일면 혼자 걷는데
勝事空自知
이 즐거움 누가 알까?
行到水窮處
계곡의 수원까지 올라가서
坐看雲起時
망연히 구름 이는 모습을 본다.
偶然値林叟
가끔 나무꾼을 만나면
談笑無還期
담소하느라 돌아가는 것도 잊고 만다.
「상사(相思)」
왕유
紅豆生南國
붉은 콩은 남쪽 나라에서 난다네
秋來發幾枝
가을이면 가지에 알이 맺히지.
贈君多採擷
그대에게 보내려 이렇게 많이 땄으니
此物最相思
이 콩은 사랑 병에 죽은 여자의 넋이라 하네.
「위성곡(渭城曲)」
왕유
渭城朝雨浥輕塵
위성의 아침 비 흙먼지를 적시고
客舍靑靑柳色新
여관의 버들잎 더욱 푸르다.
勸君更盡一杯酒
그대 한 잔 더 들게나
西出陽關無故人
서쪽 양관을 나서면 술친구도 없으니.
**
왕유(701?~761)는 당나라의 시인으로, 자는 마힐(摩詰)이다. 지방 관리의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문장과 음악에 재능을 보여 상류사회의 총아로 각광받았다. 과거에 합격한 뒤 지방으로 좌천되어 10년 동안 실의의 시절을 보내고 중앙 정부로 돌아왔다. 736년에 악명 높은 이임보(李林甫)가 재상이 되어 율령정치가 쇠퇴하기에 이르자 정치에 실망하게 되었다.
그러나 관직을 버리지는 못하고 관료로서 순조롭게 승진하는 한편, 망천(輞川) 지역에 거대한 별장을 지어 은거했다. 안녹산의 난 때 투항한 것이 문제가 되어 난이 평정된 뒤에 관직 박탈 처분을 받기도 했다.
상서우승(尙書右丞)의 직위에 있을 때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왕우승’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의 시는 도잠(陶潛)과 사령운(謝靈雲)의 흐름을 계승하여 새로운 자연미를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고담(枯淡) 속에서도 풍성한 감각을 지닌 작품이 많다. 열성적인 불교 신자이기도 했고, 산수화의 거장으로서 후세에 남화의 시조로 추앙받게 되었다. 그가 시화를 통해 추구한 것은 현세를 누리면서 은둔을 즐기는 이상적인 문인의 경지였다.
박성우님의 댓글

어떻게 하면 이렇게 부지런하게.....
다작 할 수가 있나요?
부럽습니다. 진심으로......
활연님의 댓글

하루 열 편도 아닌데 다작이라뇨,
노닥노닥 하다보면 수백편 쓴 것들이 뒤에 있지요.
아직 여물지도 뭐가 되지도 못한.
고치고 생각나면 쓰고,
내가 나를 데리고 노는 방법입니다.
소설가라면 하루 수백 편은 써야 한 권을 완성하겠지요.
나는 그냥 소실가(小失家).
하듣흰님의 댓글

(휴, 밥 먹고 살기 힘드네요. 벌써 한 시..)
왕유가 지천이군요. 김 시인님 머리는 세 개, 손가락은 백 개다에 전 재산 걸어봅니다.
정지상의 <송인(送人)>과 <대동강(大同江)>은 연구자에 따라 시제가 서로 바뀌는 듯합니다. 아시는 것처럼 한문학 연구자들은 그의 수많은 저작들이 몇 편밖에 전하지 않는 이유를 정지상이 서경천도 운동과 묘청의 난과 관련하여 인종 13년(1135)에 참살을 당한 것에서 찾더군요. 정지상의 출생연대도 정확하게 알려진 게 없다네요. 두 시(송인과 대동강)의 시제가 연구자에 따라 달리 달리는 것도 두 시의 시제를 명확히 전해주는 사료가 없어서 정황을 근거로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겠죠.
한시는 한자뿐만 아니라 압운법과 평측법과 같은 초분절적 요소와 기승전결 및 대구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제대로 감상할 수 있어서 어렵긴 하지만 그래도 몇 편 더듬더듬 해석하다 보면 요즘 시들, 여기 다 있네라는 생각이 문득 들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수입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조들이 모두 이미 우리 속에 있었다는 얘기도 가능하죠.
김 시인님의 이 시를 읽으면서 정지상의 <송인>이 왜 갑자기 떠올랐을까요? 저는 숫자를 월로 읽고(신기하게도 절묘하게 어울림) 더 울컥했는데 오독도 때론 보탬이 되네요. 제가 떠올린 동명의 시는 아래와 같습니다(해석은 그냥 붓 가는 대로.
뜰 앞에 낙엽 하나 떨어지니/말 없던 풀벌레도 슬피 우네//하도 빨라 잡을 수가 없었는데/한가로이 어느 곳을 가시는지//마음 한 조각 산모퉁이 달려가나/달 밝은 밤 외로운 꿈만 꿀 뿐//남포 봄 물결 푸르거든/돌아온단 그 언약 저버리지 마시길). 올려주신 시류가 사실 제가 집중하는 대목인데 독자와의 소통에서 성공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서 매번 참담해지더군요. 그게 궁금해서 한번 놓아봅니다.
送人
--------------------------- 鄭知常
庭前一葉落 床下百蟲悲 정전일엽낙 상하백충비
忽忽不可止 悠悠何所之 홀홀불가지 유유하소지
片心山盡處 孤夢月明時 편심산진처 고몽월명시
南浦春波綠 君休負後期 남포춘파록 군휴부후기
활연님의 댓글

사실 이 시를 적고 뭐라 변명을 늘어놓을까, 생각했지요. 처음부터
369게임 뭐 이런 걸 의식한 것은 아닌데, 뭐 하나 뼈다귀라도 있어야, 그러고 숫자를 조정한 것인데
사실, 그것은 익명의 공간, 혹은 어떤 공간이거나 어떤 시간의 흐름, 그 지점 따위.
(여기 몇몇 분을 빼고는 도대체 뭔 소리야, ㅎ, 그게 다반사, 그래서 과도하게 풀어 이런 식일 수 있다 뭐,)
알레고리가 없으면 흩어지기 쉬우니까, 뭐가 옷걸이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
감상이나 평설이 아니라면 설명하는 꼴이 되겠는데, 일반적으로 독자들이
이런 시를 읽고 좋다 나쁘다를 말하기는 어렵겠지요. 사이버에서는 약간의 변조만 있어도
인내심을 가지고 봐주지 않으니까, 그러나 결국 시는 자신으로부터 발원한다는 생각....
저는 하듣흰님의 '독특함'에 매료되었는데,
그것이 무기가 되겠지요. 사이버에 방류하는 것이야 친절하면 좋겠지만, 꼭 그 기분에
맞출 필요는 없겠고요.
아래는 다소 '난해성'이 있어나 '새로움'이라고 평가받는 젊은 시인의 시에 대한 평설인데,
아마도 이런 것에서 뭔가를 생각하지 않을까 싶어, 공부하려고 꿍쳐둔 것 꺼내놓았습니다.
이 송인도, 참 좋군요. 저는 한시나 시조나 그런 것에는 전혀 눈이 없어
읽을 줄 모른답니다.
.......................................
한인준의 시 「색채」평설
색채
한인준
물속에서 젖은 물을 꺼낸다
면적일까
한쪽에는 수건의 자세만 걸어두었다
위치가 축축해질 때까지
우산이 쏟아져 내린다면 다채로운
빗속인가
나는 모습이 되지 않는다 화장실을 바닥에
떨어뜨린다
구겨져 있는 옷에서 온몸을 꺼내주겠니
물속에서 젖은
물을 움켜쥔다 완성이라고 하는 것을
흘려보낸다
《현대문학》2015년 10월호
.........................................
개념의 한계를 탐사하는 말의 위상학
장은석 (문학평론가)
‘색채’라는 말은 하나의 “빛깔”로 쓰이는 동시에 “사물을 표현하거나 그것을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나는 일정한 경향이나 성질”을 가리키기도 한다. 사전은 이것을 '강렬한 색채'나 '보수적 색채'와 같은 용례로 알아보기 쉽게 구분한다. 구체적 용례의 문장을 보면 우리는 이런 의미의 확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빛깔을 나타내는 말이 경향이나 성질을 나타내는 데 쓰이게 된 이유를 알기는 쉽지 않다.
분야마다 '색채'를 설명하는 방식은 조금씩 다르다. 그렇지만 '색'이라는 말에 '채'가 따라붙으면 지각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고 판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색채'는 물리적 현상인 '색'이 눈과 같은 감각기관을 통해 지각되는 경험효과를 가리키게 되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색채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물체라는 개념이 따라다닐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색채라는 말에는 물체가 지닌 고유의 성질이나 어떤 물리적 현상뿐 아니라 그것을 인식하는 주체의 지각 행위가 담길 수밖에 없다.
한인준의 시에는 말이 물체라는 개념, 대상의 모습의 억눌림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한 고투가 가득하다. 따라서 '색채'라는 말을 단순히 하나의 빛깔 정도로 이해한다면 이 시를 제대로 음미하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시 속의 언어는 어떤 대상을 묘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인은 망막에 맺히는 빛의 상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 관심이 많다. 하나의 대상이 개념화되기 이전의 상태 또는 막 개념화되는 순간에 한없이 집중하는 것이다.
"물속에서 젖은 물을 꺼낸다"와 같은 말을 부조리한 말장난으로 취급해서는 곤란하다. 이 시인의 자세는 말을 비틀고 꼬아서 흐려지게 만드는 무책임한 시도들과는 전혀 다르다. 예컨대 "손목에서 손이 튀어나온다면 뒤늦게//주머니를 생각해봐요"(「말끝을 흐리다」)와 같은 구절을 떠올려봐도 좋겠다. 손목에서 손이 튀어나온다는 말은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는 맥락과 연결되면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워진다.
시인이 말을 다루는 방식은 마치 위상학 같다. 그는 말로 대상을 감싸기보다 말이 놓이는 '자세'와 그것이 늘어나면서 생기는 '면적'과 그것이 놓이는 '위치'를 탐구한다. 이러한 태도는 마치 색채가 사물의 모습을 그리는 도구가 아니라 감정과 사유를 형성하는 것이라 본 칸딘스키의 태도와도 닮았다. 「연출연습」과 같은 시를 보면 시인의 언어가 죽음을 향해 직선으로 늘어선 문장의 일반적 형태로부터 벗어나 높낮이를 지니고 대각선으로 횡단하다가 곡선으로 지나가는 시도를 알 수 있다.
젖은 옷에서 잘 벗겨지지 않는 온몸을 꺼내듯이 시인은 지금 난처한 인식으로부터 자신의 말을 힘겹게 꺼내고 있다. 짧은 글에서 모두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이런 시도는 하나의 개념을 완성하려는 것과 다르다. 그는 "완성이라고 하는 것을 흘려보"내지만 "물속에서 젖은//물을 움켜"쥐는 시도를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계속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는, 무겁고 축축한 우리의 감정이 맺히는 곳을 따를 것이다.
시적 독백의 새로운 가능성
신동옥 (시인)
완벽한 색은 '흰빛'이거나 '검은색'이다. 모든 것을 섞어서 모든 것을 없앤 후에야 색이라는 절대적인 시공간의 완성대에 도달할 수 있다. 추상회화는 인간의 힘으로 재현할 수 없는 것에서 발생하는 '절대'와 '숭고'를 비재현의 방식으로 보여주려는 안간힘이었으니 말이다. 말레비치가 '쉬프레마티즘'으로 도달한 것은 형식의 영도였다. 형식이 영도에 도달하고 무화되는 순간 극단의 여백이 발생한다. 이것은 흰빛이라는 색채의 완성형과 근사하다. 빛에 빛에 다시 빛을 섞으면 흰색이 된다는 것. 색에 색에 다시 색을 섞으면 검은빛이 된다는 것. 이 아이러니가 말해주는 바는 바로 바로 어떤 형상이든 그 안에 그것만의 특이한 자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 형상에 다른 형상을 겹치는 일이란 서로 겹치는 성질을 덜어내고 남은 나머지를 애써 고유성이라고 각자성이라고 우기는 지난한 논리 싸움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것. 고유한 것이란 세계가 모두 품고 있는 어떤 동일한 자질들을 덜어낸 찌꺼기거나 나머지에 불과할 수도 있음이다.
'젖다'라는 말을 상상해보자. 곧장 '마르다''보송보송하다'라는 말이 곁따른다. 그뿐인가? '수건'이며 '화장실''옷'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그러나 '젖다'라는 말을 존재시키는 것은 일차적으로 '몸'과 '물'이다. 이제 '젖다'라는 단어를 상상해보자. 몸은 어디에 어떻게 있고 물은 어디에 어떻게 있는가? 단어를 상상하는 일이란 이처럼 이미 '의미화된 대상'과 기표 간에 형성된 자의성을 벗겨내는 일인 셈이다. 기표와 기의 사이에 자의성이 내재하고 여기서 어떤 통약 가능한 기호의 필연성도 찾을 수 없다는 시각은 부정된다. 기표는 이미 의미화된 채로 세상에 내던져진 '대상'들과 자의적인 관계로 결합하기 때문이다. 시인이 '단어' 하나를 마치 물질인 양, 느낌이나 정서인 양 상상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여기에 있다. 시 문법의 자의성은 여기에 근거한다.
한인준은 '단어'를 도구로 시를 쓰기보다는 '단어'를 상상하며 시를 쓰는 시인인 듯하다. 시인 가운데 누가 단어를 주어진 그대로 두고 상상하려 했는가. 무모하고 공허한 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단어만으로 단어를 상상하는 일은 시적 대상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된 사물의 자질'을 시에 전혀 끌어들이지 않는 일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한인준은 여기에 '여백'을 끌어들인다. 이 시인은 행과 행 사이에 행의 '면적'보다 더 깊은 부피를 부여한다. 저 띄엄한 행들은 읽는 이들을 당혹하게 만든다. 적어도 두 행 아니면 세 행은 이격된 채로 문장과 문장이 단어와 단어가 '더디게 이어지고' 있다. 단어와 단어를 이어 붙여서 읽어야 한다는 읽기의 위상학을 깨부순다. 만일, 시로 쓰려고 하는 그 무언가(시적 대상)와 시인 사이의 거리가 지나치게 멀거나 지나치게 가깝다면 한인준이 보여주는 형식은 단번에 무너지고 말 것이다. 시에서 행과 연의 자의성이란 생각보다 미묘한 '질서'로 시를 옥죄기 때문이다. 시는 '시라는 최소한의 형식 요건'을 제약으로 삼으면서 그 제약을 뛰어넘는 시도를 동시에 보여준다. 흔히 시 형식을 자유와 연결 짓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젖다'라는 단어는 수건이나 화장실이나 몸이라는 단어보다는 "젖은 물"이라는 단어 속에서 오롯이 드러난다. '타버린 불'이랄지 '빈 공기'와 같은 단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묘한 어감이 태어난다. 그러니까 '젖다'라는 단어는 '젖은 물'이라는 어구로 완성되는 셈이다. '모습'이나 '면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뉘앙스와 기미가 인간의 행태를 빼곡하게 에워싸고 있다. 한인준의 시는 이처럼 무대를 상상하면서 종이 위에 기입된 일인극의 '동작-상태지시문'과 같은 형식으로 시를 완성하고 있다. 완성이라고 불러도 된다면, 완성의 한 방법을 발명한 셈이다. 그의 첫 시집이 기대되고 그만큼 걱정된다. 기다리겠다.
《시인동네》2015년 겨울호,「견해와 시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