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옥상에 허공 한 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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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옥상에 허공 한 그루
그루터기만 남은
사각의 링 같다
꽃불 든 야트막한 산이 빙 둘러 서 있다
축농증 걸린 달이 누런빛 흘리는
공중 발치
홀씨 하나 가늘게 뻗어 희미해져야 닿는 강이 있다
뱃삯을 내고 건너면 기억이 마르는
사라진 포구가 다문 흙 아래 꿈틀댄다
널빤지 파도가 밀려오고 밀려간다
모로 세운 성냥갑이 저마다 검푸른 빛을 보낸다
눈이 비린 밤이 눈가를 움찔거리듯
공중까지 자란 흙
구름 웅덩이는 말라 있다
휴면기에 든 공중
아무도 찌르지 않았는데 피가 난다
낙오한 병사의 부러진 타전처럼 난, 타전
눈자위 문지르던 권투 선수가 터진 입가를 훔치듯이 밤이 오고
횃대에 걸린 새물내가 항복, 항복 펄럭인다
훅과 어퍼컷으로 단련된 주먹 묽게 저어
뎁히다 만 허공 구들, 한 그루 연기가 피어오른다
댓글목록
활연님의 댓글

축복은 무엇일까
심보선
나는 아이가 없다
나는 아이가 없다
아이가 있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내 앞으로 뛰어가는 아이를, 얘야, 하고 불러
멈춰 세운다는 것은, 그때 저 앞에 정지한 그림자가
내게서 떨어져 나온 작은 얼룩임을 알아챈다는 것은
아이의 머리칼에 붙은 마른 나뭇잎을 떼어준다는 것은
그것을 아이에게 보여주며
이거 봐라, 너를 좋아하는 나뭇잎이다
라고 말하며 웃는다는 것은
내가 죽어도 나를 닮은 한 사람이 죽지 않는다는 것은
먼 훗날 내 죽음을 건너뛰고 나아갈 튼튼한 다리가
지금 내가 부르면 순순히 멈춰 선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나는 아이가 없다
아이 대신에 내겐 무엇이 있나
그렇다
내겐 시가 있다
내겐 시가 있다
시를 쓰며 나는 필사적으로 죽음을 건너뛰어왔다
나는 죽지 않기 위해 시를 썼다
군대 있을 때
아버지 장레식장에서
바로 어저께 회의에서
내가 울지 않고 죽지 않는다는 증거들
그들의 눈높이 아래서 몸부림치는 별빛들
한 편의 시가 별자리가 되려면
수천수만 명의 시인이 죽어야 하리라는 것을
그들은 모른다
나는 자위를 끝내고 난 다음에 반드시 시를 썼다
그것은 마치 부활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아이가 없다
아이 대신에 내겐 또 무엇이 있나
그렇다
당신이 있다
당신이 있다
나는 당신의 머리칼에서 마른 나뭇잎을 떼어준 적이 있었다
당신에게 새 이름을 지어준 적도 있었다
지금은 그 이름을 잊었지만
아이가 있었다면 아이에게 해줄 것들을
나는 당신에게 해주었다
나는 당신이 눈앞에 없을 때
허공에서 당신의 얼굴을 골라냈다
그것은 너무 쉬웠다
나는 당신 없는 허공을 당신으로 채워 넣는
청동 시계를 눈동자 안에 지니고 있었다
나는 죽지 않기 위해
죽지 않기 위해 당신과 사랑을 했다
당신은 아직도 내 나이를 모른다
내가 얼마나 죽음 가까운지 모른다
당신은 순진하고 서투른 열 손가락을 가졌다
당신은 내 나이를 셀 수 없다
당신은 내 나이가 아니라 죽음을 모르는 것이다
당신은 모른다
축복은 무엇일까
아이가 나를 부를 때 생기는 귓속의 부드러운 압력일까
내 주위에 언제나 나를 좋아하는 바람이 분다는 것일까
나는 아이가 없다
아이는 축북일까
아니 그것은 그저 하나의 사실이다
나는 모른다
내가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나는 그 사실을 소유한 적이 없다
나는 안다
시를 쓰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나 대신 죽어간다는 사실을
그들은 나 대신 죽어간다는 사실도 모른 채
죽어간다, 내가 태어나지 않은 내 아이를 대신해
살아가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나의 연인이 누군가의 행복을 대신해
슬퍼하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나의 시가 누군가의 슬픔을
대신해 사라지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축복은 무엇일까
당신이 나를 부를 때 생기는 귓속의 부드러운 압력일까
내 주위에 언제나 나를 좋아하는 바람이 분다는 것일까
당신은 나의 축복일까
내가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나는 모른다
나는 모른다
나는 당신을 소유한 적이 없다
`
kgs7158님의 댓글의 댓글

특이한 멋지ㅣㄴ글입니다
활연님의 댓글

두 마리 물고기
박연준
어린 시절 목도한 부모의 교합 장면은
지느러미를 잃은 두 마리 물고기가
진흙 속에서 허우적대는 모습 같았다
방은 어둡고 습했다
두 마리 물고기는 괴로워 보였고
오줌이 마려웠던 나는
조용한 가운데 모아지는 호흡 소리와
어둠 속에서 피어나는 낯선 움직임이
무언가 애달프단 생각 때문에
타버린 숲처럼, 쓸쓸한 기분이 들어
눈을 감고 오줌을 참았다
어쩌면 그때, 그 슬픈 몸부림을 빌려
동생이 태어났는지도 모르겠다
박연준, 시집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에서.
하듣흰님의 댓글

<로마사논고>에 이를테면 투표권들은 가난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는데
어디든 가보면 스폰지로 종편이나 닦는 게 대낮 풍경이니
장기 임대를 위한 500년쯤 된 이론이 천장을 갉아 먹어도 옳소가 상당량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
개인적으론 우리는 지금 조선시대 말엽이다를 확신하죠.
피케티가 신자유주의 목을 밟고 나오는 대류는 변함없겠으나 세월 좀 먹는 댐들이 너무 강력하다
100년 걸리겠다는 물증만 자꾸 나오는데 이민 가는 자 좇을 수도 없고 국민탈퇴할 수도 없고.. 우리는 이달 같은 아까운 이 너무 많다는 생각.. 세력은 자꾸 타계해 연기처럼 사라지니 안타깝고, 맘 먹고 열심히 살아보자는데 뒤에서 벽돌 들고 심심할 때마다 때려대니.. 절경 한번 읊는 것도 죄가 될 것만 같은 요즘, 시인들 참 불쌍타는 생각으로 감상문 갈무리합니다. 이 시 맘에 들어요. 매끈하니 잘 빠졌다는 생각..
활연님의 댓글

《아함경(阿含經)》에 나오는 고집멸도(苦集滅道)를 우리 어른들은 다 이루었다고 봐야겠지요.
고통의 원인이 집착 또는 갈애이며 고통을 소멸시키는 원인 또는 수단이 도라는 연기관계를 밝힌 것인데 이미 도를 이루었다고 봐야겠지요. 도를 얻었으니 세상은 무고하고 평온할 것입니다. 일베충들이 그들을 지원하면 되고요. 우리 어른들은
니들이 도를 알겠늬? 할 것이고,
세상은 고집에 멸하지 않겠지요. 과거를 기억하려 하는데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다 아름다울 것입니다. 추억을 소환하는 방식이 그런 것이니까.
시인은 그림자 발가락만 뒤적거리는 연약한 자인가, 대중가요보다 못한 노래를 노래 부르며 가객을 자처할 것인가, 생의 신비를 발굴했다고, 혹은 지금 내가 너무 아파 죽겠다고 하소연하겠는가, 피 묻은 연필은 단칼에 잘리고 말 것인데
문장 속에 무슨 비기秘記가 숨었다고 몸살을 앓는 것인지.
생각해보면 밥을 먹고 밥을 먹고 밥을 먹고 밥을 먹고
생각해보면 술을 마시고 술을 마시고 술을 마시고
생각해보면 뭐 그럴듯한 연애 없나 어느 날 불어닥친 삼삼한 사랑 없나 지독한 눈부심 없나
생각해보면 세상은 잘 굴러갈 테고 다들 잘 먹고 잘살 것인데
이제는 백년시대라니 몸 관리가 최고야 건강이 최고야 죽으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지
좀 더 기다리면 이백년시대가 올지도 몰라 그때도 자지가 설지 몰라 그때 신비로운 여인이 나타날지도 몰라
우리 어른들은 번뇌를 없앤 깨달음의 경지에 올랐으니까, 누구나 할 것 없이
누가 뭐래도 꼴통동맹을 이어가면 될 것이고 일베충과 어울리며 젊음을 유지하고 어버이연합 무대뽀 충견들을 앞세우고
우리는 항구적으로 늙어갈 것이므로 이 세상도 늙어갈 것이므로.
시인은 태생적으로 불쌍한 존재,
시인은 애초에 없는 것을 파겠다고 누진 갱(坑) 속으로 들어가는 자
시인은 지랄염병에는 일가견 있으나 무력한 자, 그 무력으로 세상 멱살을 잡는 자
시인은 다만 이웃에 사는
평범한 소시민.
이장희님의 댓글

[그루터기만 남은
사각의 링 같다]
옥탑방에서 잠깐 살았던 적이 있었어요.
옥상에 있어 운치는 있더군요.
친척누나가 옥상에 평상도 해놓고, 상추도 스티로폼 박스에 키우던군요.
정말 좋은시 잘 감상하고 갑니다.
늘 건필하소서 활연님.
강태승님의 댓글

이런 법운지 보살같은-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