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6】먼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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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생
오래전 개켜둔 그림자를 입었다. 묵혀둔 그림자를 신었다. 민틋하게 닿았다.
그림자를 들춰 갱(坑) 속으로 들어갔다. 그림자의 살갗과 표정과 인간의 냄새를 벗은 그림자의 신생을, 헌옷의 과거를 둘러썼다.
*
먼지 서랍으로 들어가 포개지던 해안선이, 악물다가 포락에 겨워 풀어진 갯돌 같은 것들이 그림자의 내지에서 살았다.
요의가 미지근하고 지루한 문장을 끊어냈다. 오래 지렸으므로 어느 날의 꽈리가 아팠다.
몇 생을 건너왔나. 그늘 속으로 아주 느리게 걸어가 쌓인 켜, 서랍 속에 벗어둔 전생을 기워 입으며 뒤척였으리라.
배후였으나 어둡기만 하였던 해거름녘엔 먼 생의 윤곽이 구워지던 저녁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
멱을 부드럽게 죄는 불타는 그림자 속으로 육체의 희미한 바깥이 어른거린다.
댓글목록
활연님의 댓글

마감 뉴스
여태천
오늘밤 내가 사는 이곳은 조용하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애인이
막차를 타고 올 것 같은 밤이다.
막 피어난 꽃
향기가 날 듯 말 듯 바람은 불어
그 바람에 가는 비가 조금 오고
내가 사는 이 작은 동네에 아주 조금은 비가 와서
버스는 제때 오지 않아
버스를 타지 않으리라고 굳게 마음먹는
그런 밤이다.
사실은 저 혼자서 떨어져 내린 명자꽃 때문이다.
먼저 간 이의 마음 같은
이름 때문이다.
사실은 아무 일도 없다는 오늘의 마감뉴스 때문이다.
먼 타지에 마음을 부려버린 남자처럼
오늘밤은 조용하다.
다른 이름을 생각할 수 없어
제발 저물지 말았으면 하는 밤이다.
마라토너
여 태 천
일요일 아침이다.
그가 뛰고 있다.
뛰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기울고 있다.
위태롭게 왼쪽 발을 내딛는
그의 등 뒤로 아침이 떠오른다
'월곡마라톤'이라는 문구가 너무 커 보인다.
그가 전력질주 하는 것을 상상해본다.
그러나 그는 기울고 있다.
그는 쓰러질 것인가.
현실과 상상을 오가며 그는 뛴다.
숨을 고르고
근육을 이완시키고
다시 숨을 뱉으며
그는 뛰어가고 싶다.
불균형 상태를 견디면서
전력질주하는 그를 상상한다.
허공을 가르며 뛰어간다.
'월곡마라톤'글씨가 희미해진다
두 다리가 사라질 때까지
뛰어간다.
일요일 아침이다.
소녀들의 기분
여태천
소녀들은 차례로 손을 들어 인사를 했다.
길고 짧은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커피와 홍차의 향기로 상대를 알아보는 건
아름다운 일이었지만 쓸데없는 짓이었다.
겨울이 만든 소녀들의 마음
갈래갈래 소녀들의 기분은 여러 개였다.
영장류처럼 두 손을 처음 잡자
소녀들은 콜라처럼 잠깐씩 흥분했다.
감정이 몸과 마음을 지배했을 때
소녀들은 왁자지껄 늙어 가기 시작했다.
구겨 넣은 소파의 얼굴을
소녀들이 몰래 펼쳐 보았다.
메아리
여태천
나는 8g씩 가벼워져서
며칠 뒤엔 손금이 없어질 것이다
흔적이 남지 않아야 할 텐데,
나는 닿을 듯 닿지 않는 가지의 끝을
생각한다.
눈, 코, 입, 피부는 먼지처럼 날아가 쌓이다가
진흙으로 뭉개지다가
한 달이 지나면
연기처럼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영원히
가시의 편이다.
어제도 오늘도
머리카락이 점점 자라듯이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들이 뼈가 되고
바람이 될 것이다.
누군가 나를 받아들일 때까지
오늘의 꽃이 내일의 아침을 열 때까지
갈비뼈를 훑고 지나갈 것이다.
말들은 하나씩 부서지며
마른하늘을 갈라놓을 것이다.
가이샤의 것은 가이샤에게
이건 오래된 이야기의 반복이다.
저렇게 오렌지는 익어가고
여태천
책이 파랗습니다 아직 읽지 않은
긴 문장의 색깔처럼
혼자 걸어가는 저 깜깜한 복도에서
오렌지가 파랗다고
아이는 재잘 재잘거리며
복도 끝에서 큰소리로 부릅니다
저 파란 오렌지가
갑자기 무서워지는 순간
아직 쓰지 않은 시를
나란히 책과 함께 세워두고
나직이 읽어 봅니다
오렌지의 문장을 모르기 때문에
아빠는 아이를 몰라서
문장의 길은 아득하기만 합니다
아이가 복도를 뛰어옵니다
아이가 내딛는 발자국마다
파란 오렌지가 시도록 눈이 부십니다
번역
여태천
나는 당신과 달라.
나는 당신을 몰라.
인격이 없는
투명한 두 문장을 가슴에 끌어안고
나는 울었다네.
한때 나는
완벽하게 마음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향해
부서지는 모든 기표에 전념했지.
무엇이 그리 짧았던가.
가늘게 떨어지는 소리의 발자국이여.
나는 이제
한 문장에서 한 문장으로 건너가는 죽음처럼
오래 슬프구나.
낱말과 낱말을 건너
비문처럼 자유로웠다면
나는 당신과 다르고
나는 당신을 몰랐을 텐데.
철학하는 여자
여태천
우리의 바깥은 고요합니다, 라고 말한 건
그녀였습니다.
수채화 물감 같은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으면 점점 번질 것만 같은 눈빛으로
하얀 손가락이 피워 올리는 저녁의 꽃
그녀의 손을 무조건 믿기로 했습니다.
언젠가는 달을 가리킬 것처럼 기다란 그녀의 손가락
다음 달에는 입가의 꼬리가
조금 더 치솟아 올라갈 것이라고 믿으며
적금을 부었습니다.
오래 기다리는 언어
신기하게도 그것은 그녀로부터
내일의 평온과 오늘의 절제를 배우고 난 뒤의 일
모두가 부러워하는 높이에서
잔고를 보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기술
점심을 굶는 그녀의 오늘과
수줍어하는 얼굴
그녀의 이력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조금씩 손가락으로부터 이별하기로 한 건
혼자 말을 배워 책을 읽게 된
한참 뒤의 일이지만
오늘 밤 멀리 있을 그녀에게
가능하다면 이 저녁의 허기를 꼭 돌려주고 싶습니다.
십 초씩, 나와 그녀 사이를 지나가는 여백
우리는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고요의 바깥입니다.
큰 바위 얼굴
여태천
그분은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얼마나 오랫동안 한쪽만 보고 있었는지
목과 뺨이 빌딩처럼 빛났다.
그분은 선천성 장애라고 했다.
밥을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항상 오른쪽만 본다고 했다.
언젠가 그의 출판기념회에서는
부모님의 말씀 때문이라고 했다.
예나 지금이나 옳은 일 하기 어렵다는
그분의 우회적인 말은 사람들에게 신념이 되었다.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사람들은 그분을 사랑했다.
그분이 교통사고로 왼쪽을 볼 수 없다고 했을 때
연말모임에 왔던 사람들은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언제부턴가 그분의 목소리가 조금씩 커졌다.
왼편에 앉은 사람들을 위해서라고 했다.
하고 싶은 말도 곧장 이야기했다.
사람들은 직선처럼 명쾌하다고
그냥 시원해서 좋다고 했다.
그분은 여전히 오른쪽만 보고 있다.
그분이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걸 본 사람은 없다.
가끔 그분도 놀라는 눈치다.
`
달의지구님의 댓글

내 오래된 요의도 미지근하고 지루한 문장이나마 끊어낼 수 있을까?
생의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다는 누군가의 표현이 떠오르고
구멍 투성이의 이파리가 내 생의 뒤안에서 버석거리는데...
잘 읽고 쉰 소리하고 갑니다. 음악은 신비하고...
글터님의 댓글

필력과 시적인 내공이 대단하십니다. 다소 난해한 시로 느껴집니다. 무어라 논평하기에는 부족한 저를 보게 됩니다.
그림자, 헌 옷의 과거, 벗어둔 전생...먼 생의 윤곽이 구어지는 저녁...불타는 그림자...육체의 희미한 바깥...으로 이어
지는 시향을 맡아 봅니다. ^^
활연님의 댓글

달의지구님도 좋은 시로 자주 뵙기를
글터님도 좋은 시 만나기를 바랍니다.
따순 겨울나기 하십시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