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틀리고 그때는 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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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틀리고 그때는 틀리다 *
그때는
살강에 얹어 놓고 조금씩 꺼내 먹었다
가끔은 술집 구석에 부려놓고 누설하기도 했다
흰 꽃비 내리는 봄날을 걸었지만 흰 꽃비 뿌리는
겨울에 그쳤다 푸른 쇄골을 보았고 도타운
살정이 붙었는데 그것은 압정 같은 거였다
한낮 숲에서 새소리를 듣거나 사라진 골목을
찾거나 포플러 마주 선 길을 걷기도 했다
백년 동안 걸어갈 길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야윌 틈도 없이 오래전 그대로
모퉁이를 돌아서면 너는 깜깜하다
지금은
편린이 모여들면 물살 차고 나갈 힘이 생긴다
기억은 부레처럼 떠올라 가볍다 달음박질도
숨차지 않았다 강기슭이나 해변에 닿기 위해
품새를 익히기도 했다 왠지 그늘을 들키지 않으려
잔털 돋은 감정은 자주 숨겼다 척후斥候를 보내고
마음은 늘 늦게 도착했다 예절은 잊지 않았다
몇 라운드를 뛰어야 마음이 편해질까, 링에 두 팔
걸친 선수처럼 불콰한 감정을 다스리기도 했다
늙은 복서는 감정의 무늬를 번복하지 못한다
노련할수록 지치는 법이니까
그때나 지금
청단이 홍단이 되도록 나뭇가지는 묵묵했다
간혹 새가 훌쩍 뛰어오를 때 낭창거리다
한쪽으로 기울어진 중심 때문에 곡선으로 예우했다
반쪽 달 기워 수레바퀴를 걸기도 했으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멀었다
두발짐승의 잠자리 겹눈은 초점이 맞지 않았다
수면에 가라앉은 굴절로 노랠 부른다
거꾸로 매달려 발가락으로 피를 보내는
동굴박쥐처럼 눈이 붉다
* 홍상수 감독 영화,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에서 차·변용.
댓글목록
활연님의 댓글

전소全燒
이영옥
나는 어느새 화염이 소용돌이치는 쪼개진 면이 되었구나
같은 곳을 가게 될 장작개비는 어깨를 포개며 다시 한 몸이 되고
나를 다녀간 기억들은 한 방향을 잡아 하얗게 말라 가는 중이구나
내가 잠시 재의 몸으로 풀썩 거린 것도 無에 이르기 위해서였구나
한 순간에 타올라 영원히 꺼지지 않는 것이 불멸이라면
화르륵 全燒 할 수 있도록 이제 눈물 거두어야 겠구나
나는 너울거리는 꽃불이 되어 가난한 옛집으로 돌아가리라
입 다물지 못한 저 쭈글쭈글한 상처위에 그믐의 촛농처럼 뜨겁게 흘러
어두웠던 한 생을 아련한 흰빛으로 굳혀 두리라
나는 내가 불 지른 공터에 마지막으로 떠나는 티끌이구나
나를 밀어올린 바람을 거스르지 않고 어둑한 이 저녁을 견뎌야 겠구나
이 세상에 먼지의 몸이라도 내리지 말고 나를 태워
바깥을 꿈꾸는 일 다시는 없게
`
誕无님의 댓글

잘 주무셨지요?
필승!
글을 읽으니
또 다른 분을 만난 거 같습니다.
숨어 있던 은자를 뵙는 거 같습니다.
짱입니다, 요.
밖에 십 분 나갔다 온 후,
다시 천천히 읽어보겠습니다.
날씨가 매우 차갑습니다.
건강 관리 잘하십시오
하듣흰님의 댓글

기침은 하셨는지 문안 인사 여쭈려는데 횡재~
두둑한 용돈 받았으니 오늘은 룰루랄라 댈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정신은 욕망에도 기생하는 편이라서 어떤 영혼은 늘 참고인석에 앉게 되는 불편을
감수한다 라고 써 봅니다.
역대급 예술가들은 대개 동물 같은 감각의 절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건 경험이 아니라 선험이라는 생각, 김 시인님에게서 그런 냄새가.. 그러다가 참 아깝다.. 젊으셨을 때 문단에 나오셨다면 우리 문단이 여러 가지로 이렇게까지 황폐해지지는 않았겠다는 생각..
신주크박스 같은 지경에 전 언제나 당도하게 될지..
써 두신 소설에서 잘라 오신 듯한 느낌(?), 빛의 굴절이라는 이미지는 요즘 보는 건데 아닌 듯하기도..
제가 요즘 난해한 기호들로 구상하고 있는 게 '압정'인데 요고 좀 빼주심이 어떠실지^^
박하 아침 뭉게뭉게 타시고 아랑부리나부룡! 하십시오~
달의지구님의 댓글

침피언의 눈이 빠른 것은
눈이 좋은 것이 아니라 눈을 따라 몸이 빨리 움직이는 것이어서
그 때도 다르고 지금도 다르다는
지구 생각!
오늘은 센치하게 다가옵니다.
현탁님의 댓글

낯설기에 중독된 시인은 어디까지 튀어 오를지
백으로 넘긴 머리 모양 만큼 멋집니다
활연님의 댓글

시 그딴 거 쓰지 말아야지 하는데 간밤에
지루하게(지루함은끈끈이주걱같은것이기도해서) 본 영화가 생각났지요.
무모한 반복과 약간의 변주,
그러니까 화법과 분위기에 따라 전혀 다른 뒷그림자를 보여주더군요.
섹스도 없고 현란함도 없는, 대화체의 권태로움에서
지루가 게워낸 편린 같은 거.
이곳은 식물적 후각이 발달한 분들이 참 많다,
그냥 놀이터 같기도 한데, 링 같기도 하다,
나는 체중조절이 안 되어서 늘 체급으로도 밀린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냥 내밀고 쑥스러워질 뿐이다.
흰 눈이 펄펄,
세상 좀 하얘지라고,
나뭇가지에 새들이 옮겨붙네요.
오신 분들, 새하얀 백지를 한 점만으로 걸어가는 날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