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자재 소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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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재 소묘(觀自在 素描) / 안희선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行) 하심에
오온(五蘊)이 모두 공(空)한 것을 비추어 보고
일체의 고액(苦厄)을 여의셨다네
아바로기데슈바라.
당신은 관세음의 신음소리입니다
병든 창녀가 힘겨운 돈벌이를 하는 시각에 그 옆에 누워
쌔근 잠든 아기의 얼굴입니다
어린 사미(沙彌)가 제 어미 그리워 눈물 적신 배겟머리에
살포시 내려앉은 달빛입니다
피흘린 십자가 아래 흐느끼는 마리아의 눈물입니다
도살장에서 죽음을 바라보는
착한 소의 슬픈 눈망울입니다
그리하여,
당신은 이따금 빛바랜 탱화(幀畵) 속의 어렴풋한 미소로
혹은,
침묵하며 제 몸 사르는 향화(香火)의 파릇한 내음으로
삼매(三昧)의 옷자락을 드리우기도 합니다
아바로기데슈바라.
당신은 공(空)한 동그라미입니다
목이 타는 나그네가 갈증 달래는 숲 우거진
풍경 속의 우물입니다
내가 갈 수 없는 머나 먼 내일에서 불어 온 만다라(曼陀羅)의 희열입니다
목어(木魚)를 두드리다 잠깐 잠이 든 상좌(上佐)의 고운 얼굴입니다
잡초 우거진 이름모를 어느 무덤가에 홀연히 피어 오른 초롱꽃입니다
아바로기데슈바라.
당신은 오래된 친구가 건네는 한 잔의 술입니다
정화수 앞에서 밤을 지새는 어머니의 영원한 기도입니다
그리하여,
당신은 이따금 새벽에 들리는 찬송가의 소리로
혹은,
지하도에 업드려 구걸하는 늙은 거지의 투박한 손으로
삼매(三昧)의 옷자락을 드리우기도 합니다
아바로기데슈바라.
저어기 맑은 햇빛 아래
아가가 방긋 웃습니다
이제,
당신이 인간의 아름다운 어머니로
나투실 시간이 되었나 봅니다
* 아바로기데슈바라(avalokitesvara): 관자재의 범어(梵語), 구라마습(鳩滅什)에
의해 후일 법화경(法華經)의 한역에서 관세음으로 옮겨짐.
觀音靈感眞言 / (頌) Imee-Ooi
댓글목록
윤희승님의 댓글

좋은 시 잘 감상하고 갑니다 안희선님
건강하시구요
안희선님의 댓글의 댓글

감사합니다..
활연님의 댓글

가끔 가져 오신 듯 낯익은 제목입니다. 오늘은 작정하고 여러번 읽었습니다.
불교적 느낌도 나지만, 뭔가 비감이 서려 있고
세상을 향한 따뜻함이 내밀하게 있는 듯도 싶습니다.
섬세하고 유려한 마음은 다치게 쉽습니다. 마음에 강철무지개
드리우고 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좋은 시 감상했습니다.
나문재님의 댓글

처처불상 사사불공이라 하는데
어디에나 부처는 있고
누구에게나 불성은 있어서
오늘은 관세음보살로 현신하고 내일은 또 다른 관세음으로 현신하고...
세상 모든것이 아름답게 보인다면 그것이 바로 부처의 눈, 하나님의 마음일것도 같은...
그러나 모르겠습니다,
나는 누구인지, 나에게도 관세음보살의 씨앗은 갊아져 있는지...
안희선님의 댓글

이 글은 암만 읽어보아도, 부족한 감이 들어 고민입니다 (폐기를 해야 할지 말지 - 웃음)
오늘도 우리 앞에 수 많은 모습으로 나투시었을, 관세음보살
그저 저를 비롯한 가엾은 중생들을 긍휼히 여기사
끝없이 윤회를 거듭하는 미망의 삶에서 구원해 주시길
귀한 말씀으로 머물러 주신 활연 시인님,
영선 시인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