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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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어지나요 - J
안녕... 애도하는 종(鐘)소리는 노을진 저녁을 닮았다 어떤 방향으로 부는지 모르는, 바람 속에 아직 따뜻한 미소가 흔들렸다 석양(夕陽)은 늦도록 주위를 배회했지만, 눈부신 그림에서처럼 둥글게 회전하진 않았다 남 몰래 달아나는 시선(視線) 아래, 막다른 동맥의 고동소리는 슬픈 징조가 되고 이윽고 말 없는 입에서 나온 최후의 말, 안녕... 나, 두려운 마음과 머리에서 부서지는 소리가 나고 너, 돌아서지 않았다 - 안희선
사랑과 사유의 공통점
들뢰즈가 말하는 사유는 그렇다. 어떤 폭력적인 형태라는 것이다. 나의 의지에 의해 혹은 평소에 갖고 있던 반듯한 기준으로 사물을 재는 것이 아니라, 강제적으로 마주쳐지는 어떤 것! 그것이 바로 들뢰즈가 말하는 사유이다. 우리는 이런 비슷한 느낌을 사랑에서 발견하곤 한다. 사랑하는 대상과 마주쳤을 때의 느낌은 분명 특별하다. 하루에 열 번을 마주쳤다 해도 못 알아봤을 평범한 얼굴일지언정 마주침으로 다가왔을 때 상대방의 얼굴은 그 어떤 미남 미녀의 얼굴보다 아름다울 수 있다. 어느 날이다. 내 남자친구 혹은 여자친구가 말했다. “우리 헤어져!”라고... 그 혹은 그녀는 구체적인 이별의 이유를 말해주지 않는다. 그냥 헤어지자는 한마디만을 남기고 홀연히 떠날 뿐……. 그때부터 나는 크나큰 충격에 사로잡힌다. 그가 왜 떠나갔을까? 내가 무얼 잘못한 걸까? 딴 사람이 생긴 걸까?...... 자! 여기서부터 들뢰즈가 말하는 사유의 메커니즘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가 말하는 사유란 우리가 생각하던 사유와는 다르다. 무언가를 비평하고자 생각을 억지로 짜내는 것이 아닌, 생각을 하지 않고서는 미칠 것 같은 기분, 그것이 사유다. 실연을 당한 나는 무수한 철학적 사유들을 하게 된다. ‘그가 왜 떠났을까? 처음과 달리 그의 마음이 변한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의 마음은 시간에 따라 변하는 것일까? 진정 불변하는 개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이렇게 변화무쌍한 인간을 믿어도 되는 거야?’라는 式의 존재론적인 질문들이 마구 쏟아지기 시작한다. 사유는 생각보다 난폭한 놈이다
칸트가 말하는 사유는 들뢰즈의 것과는 다르다. 그의 말대로라면 감성 지성 이성의 세 조화 속에서 우리는 자유롭게 사유를 해낼 수가 있다. 물론 칸트의 사유가 무작정 쉬운 것만은 아니다. 감성은 수동적인 성질을 가진 반면 이성은 능동적으로만 작동한다. 이 대립항對立項 속에서 사유하는 우리는 혼란을 겪을 수가 있다. 우리의 인식은 이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루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에 이 대립적인 두 성질을 적절히 혼합 배분하는 그 무언가가 필요하다. 우리는 그것을 '상상력'이라고 부른다. 즉 대상을 이미지화하는 능력인데 칸트의 말대로라면 우리는 이 상상력이라는 능력이 더해짐으로써 완벽한 사유를 해낼 수가 있게 된다. 하지만, 들뢰즈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사유에 관한 한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기존의 인식능력들로 가뿐히 해결되는 것들은 들뢰즈에게 있어 사유가 아니다. 인식들이 미쳐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제어되지 않는 것이 들뢰즈가 말하는 사유이다. 사유는 Philosophy(철학)라는 사랑의 어원 따위는 가볍게 무시한다. 그저 폭력적이고 성난 황소처럼 내면을 어지럽힐 뿐이다.
사유는 생각보다 따뜻한 놈이다
그렇다면 사유하는 사람은 미친 사람인가? 그건 또 아니다. 그러한 미친 경험은 생각보다 흔하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들뢰즈의 ‘사유’는 평소 우리가 갖춘 인식능력을 가뿐히 뛰어넘는다. 사유는 끊임없이 주어져 있는 인식의 이미지 틀을 깨고 전진한다. 그것을 본질 존재에 다가가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모든 공리公理 axiom와 인식 능력들을 파괴하는 방식! 단지 이것은 방식이 폭력적일 뿐 그 너머에 있는 종착점은 한없이 포근하기만 하다. 들뢰즈의 개념들 중 너무나도 많이 들어왔던 탈영토화, 해체의 이미지, 파괴의 이미지는 이렇게 진정한 창조에 다가가기 위한 수단으로서 작용한다. 사유하기를 통해 고정된 개념과 작별하고 무한한 사유의 창공으로 비상하는 것, 우리는 언제쯤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사유할 수 있을까? - 이지영의 '들뢰즈의 사랑'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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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leuze, Gilles
1925 파리 출생 1944 소르본느 대학에서 철학 수업 1948 철학교사자격 취득 같은 해 철학 교사를 시작해 57년까지 지냄 1969 파리 8대학에서 푸코의 뒤를 이은 교수 생활 1969 펠릭스 가타리를 만나 공동저작 기획 1987 교수 은퇴 1995 자신의 아파트에서 하늘나라로 감
이지영
「들뢰즈의 『시네마』에서 운동-이미지에 대한 연구」로 서울대에서 박사 학위 「영화 프레임에 대한 연구」로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영상이론과 예술전문사(M.A.)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홍익대학교 등에서 강의 논문으로는「들뢰즈의 『시네마』에 나타난 영화 이미지 존재론」, 「H. Bergson의 지각이론」, 「이미지의 물질성과 내재성에 대한 연구- 지가 베르토프의 영화 이론을 중심으로」, 「<올드보이>의 이미지와 공간의 형식에 대한 분석」등이 있음
댓글목록
안희선님의 댓글

어느 분이 귀한 시간을 할애하시어, 저의 이 졸시를 읽고...
실연을 당한 거냐? 하고 물어 오셔서
참, 시문학사이트인 시마을에서
이런 뜻 밖의 반응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예나 지금이나 한 편의 시를 쓴다는 작업은
대부분의 경우, 사색의 자유를 뜻합니다
그건 끝없이 뻗어가는 꿈 (상상력) 때문입니다
지향志向때문입니다
아무튼, 동시에.. 그건 저 자신의 한계일 수도 있겠습니다 - 시적 상상력의
어쨌거나, 시의 대상 혹은 소재는 다채로울 수 밖에 없는 거죠 (어떤 시인이고를 막론하고)
한편, 제 아무리 같잖은 시라도 그걸 쓴 사람이 기울인 정성이 있는니만큼
읽는 이의 입장에서도 최소한의 정성을 기울인 시읽기여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다시 또, 강조하지만
결국, 시는 시 이상도 시 이외의 다른 아무 것도 아닌
詩 그 자체로서의 예술이란 점.. (이건 그간 입이 닳고 닳도록 얘기한 거)
또한, 이 참에 저 자신에게 이런 질문도 해 봅니다
문학이란 무엇일까?
그 자체가 목적인가 아니면, 삶의 한 방식인가
일찌기 하이데커는 현존재 現存在 가 존재하고 있을 때만
존재자 存在者는 폭로되어 있다고 하고,
휘셰 같은 이는 실험적인 것들은 다 과정에 불과하고
실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던가요..
그리고 보면, 시문학이란 건 결국 원고지라는 거울에다가
자기자신을 그려 넣고 그 자기라는 존재를 확인해 가는
구체적인 삶의 한 方式, 한 과정으로서의
자기 정신의 노출 내지 志向에 다름 아닌 거라는 생각
한편.. 늘 시의 내용을 제대로 전달치 못해 오독만 유발하는 오독유발자,
저의 부족한 글 나부랑이도 이쯤에서 접어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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