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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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평화
전에 살던 고향이 생경(生硬)하니, 낯설다 차가운 아스팔트만 무언 가를 주문(呪文)처럼 중얼거리며 깜깜한 입 안 아득한 곳에서 뽑힌 회색빛 혀가 되어 누워있다
그래도 미소짓는 추억이 있어 눈물겹다고 해야 하나 삶은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에 오직 한 번 출렁이는 물결인데, 무엇이 찰나(刹那)의 삶을 증명하기 위해 평생을 애쓰게 했을까 지금껏 살아온 어두운 힘만으로 모자랐던 것일까 단 한 가지만으로도 족(足)할 것같은 사랑, 혹은 따사로운 정(情)과 정겨운 풍경이 모두 사라진 세상에서 짐짓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집하는, 모든 아름다운 꿈들은 연한 가슴의 속살로 아직 유효하다 최소한 그런 신기루(蜃氣樓) 같은 위안으로 여전히 살아지는 것일까
그러나, 아무 것도 못 믿겠다는 믿음이 차라리 정직하리라 그런 것이다, 대책없이 더러워지는 저 유심(唯心)한 것들 세상의 온갖 가증(可憎)스러운 것들보다 더 지독히 미운 헛사랑들
더 이상 행복을 꿈꾸지 않을 일이다, 아무런 기쁨 없이도 살아질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 나 부터라도 나에게 정중한 예법으로 하심(下心)해야 한다 나라는 기괴한 물건에 구매(購買)의 눈길조차 돌리지 말 일이다 내 안에서 고상한 척 내숭떠는 스멀스멀한 말들도 몽땅 지워버릴 일이다 사람의 말(言)보다, 특히 시인의 시(詩)보다 어두운 것이 또 어디 있을까
아, 내 안의 마지막 평화를 위해서라면 무조건 잔인해질 일 실신하듯 견디며, 듣는 저 투명한 종(鐘)소리는 이제 비로소 눈물이다 내가 원하고 바라는 모든 것들을 지우는, 평온의 화음(和音)이다 오래 전에 만신창이(滿身瘡痍)가 된 영혼과 화해하는......
피빛 포옹(抱擁)이다
그건 온순한 탈을 쓴, 연하고 착한 얼굴로는 되지도 않을 일 더욱 상(傷)해가는 영혼을 이제라도 펄펄 끓는 물에 담그려면, 차마 하기 싫어도 , 신음으로 끙끙거리며, 비록 칭얼대며 할지라도, 반드시 가장 무서운 모습으로, 내 스스로 해야 할 일이다 - 안희선
댓글목록
핑크샤워님의 댓글

시와 음악이 어울어지더니만, 그 옛날 단발머리 소녀시절에 보았던 영화 "라스트 콘서트"가 문득 떠오릅니다..왠지 뜻모를 먹먹함이 가슴에 차 오르는 군요!,,,,시인님은(저는 시인님에 대하여 전혀 아는 바가 없지만) 매우 절제되고 정제된 감성의 소유자 같다는 느낌,,,,,근데, 그런 시인님의 감성은 마치 시인님이 일깨워주신 "들뢰즈"의" 사유"의 개념과 매우 흡사하다는 엉뚱한 생각이 드는 군요!, 왜 그런지는 저도 모르겠네요, 아마도 시인님은 답을 아실듯 싶습니다..문학에 문외한인 제가 그 답을 들을 수 있을 런지요?/ 기존 과는 사뭇 다른 시 잘 감상하고 갑니다 / 고맙습니다.
안희선님의 댓글

요즘들어, 부쩍 그런 생각이 들더랍니다
내 <마지막 평화>를 위해 이런 하찮은 글쓰기도 그만 두고 싶다는
오늘 올린 위에 저 글을 보더라도 , 저는 저의 <하잘 것 없음>을
새삼 자각하곤 하지요
- 저딴 글이나 시랍시고 써대고.. (한심)
어찌보면, 저 <다짐>을 실행에 옮기기는 커녕 오히려 역행을 합니다
(저 글을 쓴지 얼마나 되었다고 - 웃음)
저런 짓꺼리를 일종의 자학自虐 아니냐고 지적해 오면,
저는 아무 할 말도 없을 거 같구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몸뿐만 아니라, 영혼도 깊이 病들었는지 모르겠어요
사실, 한 편의 시를 쓴다는 건 해당시의 시작과정을 전재全載하는 건 아니겠지만서도
<감당할 수 없는 고통> 때문에, 혹은 그에 걸맞은 심상사고心像思考를 진술함에 있어
그를 밑받침 하는 보다 구체적인 체험적인 상황들이 제시되어야 하는데..
저의 졸시는 전혀 그러하지 못하고 그냥 무책임하게 뱉아내는
푸념쪼가리 같은 글이 되었네요
글구, 물어오신 질문에 대하여..
저 역시, 이때껏 시라는 밀림 속을 헤매이는 처지라
샤워님이 원하시는 답은 드릴 수 없고 또 그럴 자격도 안 됩니다
다만, 지금 이 순간 현재적 顯在的인 나의 삶이 오로지
고통이란 것 밖에는 모르겠네요
아무튼, 시라는 건 독자에게도 시를 이해하는데 무언가 도움이 되어야 할텐데..
전혀 그렇지 못해 죄송할 따름
글 같지도 않은, 넋두리에 귀한 말씀으로 머물러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