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비행
페이지 정보
작성자
본문
야간비행
칠흙처럼 어두운 밤에 더듬이 없는 비행. 계기판엔 이미 모두 붉은 불. 돌이킬 수 없는 착오처럼 점멸(點滅)되는 그것들. 작동되지 않는 자동조종장치와 기능을 상실한 관성항법장치. 일상의 안도(安堵)처럼 준비되지 않은 낙하산의 후회. 오직 느낌과 Zero시계(視界)에 의한 곡예비행. 지금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으나, 추락을 준비하는 이 순간은 차라리 담담한 침묵. 너무 큰 절망은 신비하게도, 또 다른 시작과 같은 느낌을 준다. 창문 스쳐가는 구름처럼 지나온 삶이 눈 앞을 흐른다. 기내(機內)의 잔인한 경고음은 아까부터 고막을 뒤흔들고. 원래 이런 비행을 계획한 건 아니었지만, 출발점에 입력된 운항 프로그램의 오류(誤謬)는 어느새 비행시간을 대낮에서 깊은 밤으로 만든다. 그 뒤바뀐 시간 속에서 빨간 불켜져 있는 예정된 파멸. 돌이킬 수 없는 시간 앞에 겁에 질린 운명은 속수무책. 어둠 같은 절망 앞에 희망은 그저 팔짱만 끼고. 어쩌란 말인가. 선택의 여지도 없는 이 드넓은 공간 한가운데서 아무 것도 모르는 운명처럼 활강(滑降)하는 기체는 돌아갈 항로조차 없는데. 삶의 파편은 흔적으로나마 대지 위에 뿌려질까. 죽음 지난 시간 속에 고통은 무엇이 되어 있을까. 혹여, 회한(悔恨)의 기억으로나 남아 있을까. - 경고문 - 여러분이 탑승하는 이 비행기는 추락이 예정된 비행기 입니다 사망.상해 및 여행자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승객은 탑승을 재고(再考)하시기 바랍니다
<시작 Memo>
그 언젠가, 한국行 비행기 안에서 지금 기류불안정과 함께 <캄차카반도>를 지나고 있단 기장의 아나운스멘트에 문득 (구)소련의 전투기에 격추당한 KAL 007편이 떠올랐다 이 글은 그때, 기내에서 끄적여 본 것
* KAL機 격추사건 이후, <북태평양항로>로 변경했던 航路를 <소비에트연방>의 해체에 따라 유류비용절감을 위해 다시 <러시아 캄차카반도항로>로 복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