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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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칼이다
나는 칼이다
죽어야 산다지만 죽을 곳이 없다
어디로 가서 모가지를 내밀어야 단박에 죽을 수 있을까
벼르고 벼린 죽음을 버릴 수 없어 휘두르다
목 떨어진 자리는 한결같이 환하다
별 볼 일 없으므로 칼 볼 일도 없다
핏기 쏠린 늦가을만 스산한 공원에서 까르르 죽을 자리를 찾는다
철옹은 칼의 반경 바깥에 있고,
가장자리 옹성은 시큰둥하다
죽을 맛을 뒤져
뽑아든 산 맛을 애써 웃으며 내밀어본다
어쩌다 칼에 찔린 칼은 칼의 깊이를 묻는다
세 번 찔렀을 때 멀쩡한 배는 없었다는 얘기,
칼같이 자르고 간다
볼 장 다 본 애인처럼 배설한 욕망처럼
머쓱해진 칼을 뱃속에 집어넣고
칼은 네 번 죽으러 떠난다
칼을 잘못 삼킨 녹슨 칼이 웃으며 절을 받는다
대체로 슬픈 것 같은데 혼자만 웃고 있다
그러나 무릎 꿇은 칼은 울음을 위문하는 것,
모든 칼은 우는 칼에게 더 공손하다
이승이라서 웃는 칼만 외롭고 쓸쓸하다
칼은 칼의 이치를 몰라 칼을 품고 눕는다
오래 사귄 애인은 익숙해서 불안하다
반성하는 칼이 칼을 열고 들어가 나를 꺼낸다
드디어 나는 곯아떨어진다, 죽은 듯이
칼 빛도 없는데 달 가는 소리 달빛도 없는 칼 가는 소리
드르륵, 칼이 나를 열고 나온다
나는 다시 칼이다
댓글목록
활연님의 댓글

난중일기 같습니다요.
나도 손목 둘레 하나 건너가지 못하는 칼이 하나 있지요.
지게미만 꾸역꾸역 뱉는 숫돌도 하나 있지요.
아무리 갈아도 예리가 안 생기는 밤들도 있었지요.
무의하니까 무인 같습니다.
대가리 머리통 꼬리 자르고 몸통만으로 횡단할 바다가 있을지
"칼빛도 없는데 달 가는 소리"에 기울여봐야겠습니다.
물 베듯 달이 흘렀으므로 허공이 뚫렸다 생각이 들기도.
'무의대사, 진군하실 때이옵니다!'
무의(無疑)님의 댓글의 댓글

작년에 쓴 글인데,
'낯선 용어에 더해 상규를 벗어난 언어의 용법이 시의 가독성을 떨어뜨'린다고 해서
상규를 벗어난 언어의 용법을
가지런하게 수정했습니다만....
꽈배기를 풀었더니 가래떡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철옹성인지라 .......... 진군해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