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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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린
#1. 1939
우리 동네에는 말이야,
맑은 하늘 아래 논, 밭이 펼쳐져 있었어.
주변에는 산도 많고, 물도 맑은 곳이지.
*코스모스 만발할 무렵
옆집에 인물 훤칠한 오라버니 보고
요동치는 가슴 행여나 들릴까
수줍게 고개 떨구고 인사를 한 적이 있었어.
오솔길 걷다가
푸른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끼잖아?
그럼 숨어야해.
산새들도 날개 푸덕이며 꽁지 빠지게 도망가고
마을 *장승들도 덜덜 떨면서 엎드려 절하는
*나으리께서 오시는 날이거든.
하필, 코스모스 필 무렵에.
#2. 밀양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거기 길바닥에서 못 일어나는 아부지요.
일어나서 날 좀 보소
아리랑, 아라리요.
나으리는 내 손 놓아주질 않고
정든 님에게 인사 못해
십리밖에 들려오는
울 어무이 울분 터지는 소리
내 발병조차 못나게 하나
#3. 망향忘向
하루에 셋, 열 중 일곱은 죽는다는 돌림병이 돌고 있데요
공장 밖에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니쿠이치’라는 말은 자주 들었어요.
내 몸은 매 달마다 꽃봉오리가 피는데 *오니들은 개의치 않아요.
오니들은 군화를 신고 있는데 단 걸 너무 좋아해요.
한 잎씩, 한 잎씩 몰려들어서 뜯어먹기 바빠요.
꽃봉오리에 푸르게 점박이 생겨요.
밤하늘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도 나질 않는데
불꽃을 품었다고 칼로 도려내는 소리에 줄기가 파르르 떨어요.
이젠 내 이름 석자도 가물가물해요.
*나으리 - 웹툰 '곱게 자란 자식' 참조. 일본 순사를 지칭하는 말.
*코스모스 탄식(1939, 박향림)
*장승 -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니쿠이치 - 일본군 29명 당 조선여자 1명이란 뜻
*오니 - 일본 도깨비
댓글목록
동하님의 댓글

코스모스 피어날 제 맺은 인연도
코스모스 시들어니 그만이더라
국경 없는 사랑이란 말뿐이더냐
웃으며 헤어지던 두만강 다리
해란강에 비가 올 제 다정턴 님도
해란강이 눈이 오니 그만이더라
변함없는 마음이란 말뿐이더냐
눈물로 손을 잡던 용정 플랫홈
두만강을 건너올 제 울던 사람도
두만강을 건너가니 그만이더라
눈물 없는 청춘이란 말뿐이더냐
한없이 흐득이던 나진행 열차
<1939, 박향림, 코스모스 탄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