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치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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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치(廉恥)없이 / 안희선
허겁지겁 살아왔다
이루어 놓은 일은 아무 것도 없다
所謂 시를 쓴답시며,
단 한 편의 詩도 쓰지 않았다
외로움이란 편리한 습관에 젖어,
어두운 나만의 둥지에서
혼자 기뻐하고 슬퍼하며 살아왔다
햇빛 아래 널브러진 욕망만 촘촘하다
그것들은 침묵하는 내 그림자와 친하다
언제나 나와 똑 같이 움직인다
하지만 유령처럼 공허하다, 숨길 수 없이
허무도 지나치면,
때로 꿈 같은 사랑도 되고, 칼 같은 實存도 된다
그 덕분에 아직까지, 나는 염치없이 살아있다
그래서 비라도 오는 날엔 우산을 쓴다
우습게도, 나 역시 또 하나의 人生인 것처럼
댓글목록
石木님의 댓글

한 편의 시도 쓰지 않으시는 동안에
얼마나 많은 잠재적인 시들이 숙성되고 있었을까요?
지하 창고에서 익어가는 포도주처럼.
어떤 시인께서 시 한 편을 탈고하시는데 10 여년이 걸렸다는
사연을 글로 쓰신 것을 본 일이 있습니다.
요즘의 시인들 중에는 1년에 백 편 이상의 시를 써서
시집으로 출판하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저는
'저렇게 마구 쏟아내는 글들도 시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되더군요.
기다리는 것보다는 기다리지 않는 것이 오히려 염치 없는 일인지도 모르지요.
안희선님의 댓글

글 같지도 않은, 넋두리에
깊은 사유로 머물러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