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물머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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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물머리에서
느티나무가 무른 가지 늘어뜨리고 있다
양팔 가지런히 적시고 그늘을 밀어주듯이
벼룻물 붓고 한 획 굽어 빛나는 외목을 쓰듯이
회오리치다가도 껴안고 겹치고 스민다
돌부리와 벼랑에 부서지며 흘러온 여울이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늑장을 부린다
격한 숨 뉘고 말간 물의 늑골로 밀리는 누우떼
다친 무릎을 구부려 목덜미를 핥아준다
그늘이 입속 깊이 입을 밀어 넣은 물의 나라
물별이 쇄골에 쌓인다
오목눈이 한배가 그늘 셋집을 얻었다
숯막에 그을린 검댕이를 푸른 버덩에 푼
편편해진 내세가 느티나무 그늘에 쉰다
아카시아꽃 종소리를 닦아 물가에 내려놓는다
*
숯막을 물가에 부려놓았네
여자의 돛배가 울렁거리네
프로크루스테스 침대*를 녹여 흘려보내네
강물이 까맣게 탄 나무 그늘을 싣고 가없이
가없이 번지네
*프로크루스테스 침대(Bedstead of Procrustes): 프로크루스테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악인(惡人)으로서, 사람을 잡아 쇠 침대에 눕혀, 침대보다 길면 긴 만큼 다리를 잘라버리고, 짧으면 억지로 잡아 늘려 그 침대의 길이에 맞추곤 했다.
댓글목록
활연님의 댓글

'밥을 딴다'라는 말
문성해
물속에서 군불로 밥을 짓던 어머니가
한 그릇 두 그릇 허공에 밥을 올리신다
커다랗고 붉은 손바닥이 깜싸올린 저 밥을
태초에 따던 하얀 손이여
태초에 벌판에서 벼이삭을 따던
여인네들 입속에 따뜻하게 고인 말도
이 '밥을 딴다'라는 말,
까치가 고욤을 따듯
다람쥐가 도토리를 따듯
이 말은 밥이 밥에 더 가까워지는 말
털 숭숭 난 사람들의 입에서 입을 타고 온 말
태초에 붉은 벌판에서 이삭을 감싼 따순 손바닥 두개여
혓바닥을 앞니에 씹듯이 떼어내며
'딴다'라는 말을 입속에 버무리던 이여
그는 일찍이 말을 지을 줄 아는 시인이 아니었을까
붉은 연꽃이 연밥을 허공에 싸안아 올리는 심정으로
태초에 밥 지은 솥을 머리에 이고 들판으로 들어가던 아낙이여
그이는 오소리보다 곰보다 큰 이의 어미가 되었거나
말을 짓는 시인의 어미가 되었을 것이다
연밥이 죄다 마이크 모양 솟아서 굽어져 있다
인근 마을에서
밥을 짓는 대신 밥을 따는 처자들이
굵은 모가지로 노래를 흥얼거리며 온다
,
활연님의 댓글

기억, 편린, 설악의 눈
활
모르고 멀쩡히 잘 살았다. 외로움은 헌 가방 같아서 그냥 들고 다닐만했다.
이국을 떠도는 사랑도 언젠가 돌아오리라 믿었다.
그냥 여행이나 가자 했다.
믿지 않았지만 자명한 죽음은 살갗에 그늘을 드리우고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숨 붙어 있을 때 가보자 했다.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을 땐 이미 늦었다.
이미 다 지나간 것들이 흐르는 물가를 걸었다. 이 길 끝에 세상의 끝이 없기를 바랐다.
길을 가다 보면 다시 돌아오는 길이라 믿었다.
두물머리엔 물길이 부딪쳐 한몸이 되는 눈부신 찰나가 정박하고 있었다.
죽고 있는데도 서럽지 않았다. 죽음 곁에서 서러워할 겨를이 없었다.
한계령을 넘자 했다.
넘다가 죽으면 아무 대책 없었으나 시간은 고무줄도 아니고 밧줄도 아니어서 이을 수 없었다.
이을 수 없는 길을 이어 해 뜨는 바다에 닿고 싶었다.
저녁 눈발이 흩날렸다. 더는 순백이 없다는 듯이 숨죽이고 내렸다.
나뭇가지가 둠벙이 눈을 받아내느라 무거워졌다.
죽음이 눈을 밀고 들어올 때였으나 죽음조차 하얗게 보였다.
오래도록 희디흰 죽음을 만졌다.
겨울인데도 춥지 않았다. 겨울인데도 원망할 것도 미워할 것도 없었다.
죽음의 발목이 푹푹 빠졌으나 그 발자국이 오래 남아 기다린다는 걸 믿지 않았다.
잠들지 못하는 죽음 곁에서 파도소릴 들었다. 파도는 이승에서 저승까지 밀렸다가 돌아오곤 했다.
눈을 잃은 별들이 밤하늘에 서성거렸지만 희미하게 죽음이 뒤척이는 소릴 들었다.
조용히 떨고 있는 것을 느꼈다. 아침은 무엇을 향해 오는지 몰랐다.
배웅하는 일은 짧았다. 죽음이 지체하는 시간은 짧았다.
두물머리-설악-바다... 한 번도 강물이 제가 살던 기슭으로 돌아가는 것을 못 보았다.
그냥 밀려서 떠내려가고 큰바다에서 모든 걸 잊는다는 걸 몰랐다.
안부를 물어올 때마다 두물머리 느티나무는 새벽이슬처럼 맑은 눈물을 흘려 강물은 하염없이 깊어지리라.
설악은 때마침 눈이 내려 발이 묶이고 죽음도 벗어날 수 없는 고립에 한철이 지나길 기다렸으면 바랐다.
두물머리를 한계령을 눈 덮인 산봉우리를 희디흰 파도를 기억하며 멀어진다.
기억도 멀어진다. 길은 기억이 잠깐 앉았다 가는 현기증이다.
지체하다 종종걸음으로 사라지는 뿌연 신기루이다.
마지막 지나치던 곳으로 흐르는 강이 있다.
강기슭엔 새떼가 쏘아 올린 눈부신 기억이 있다. 한계를 뛰어넘고자 했던 봉우리가 있었다.
눈발이 모자를 씌워 그 처량을 읽을 수 없었다.
밤새도록 대신 울어주던 파도소리가 있었다.
泉水님의 댓글

두물머리의 한가롭고 조용한 정취, 그러나 그 내면에 숨겨진 생태의 치열함을
회화적요소를 가미하여 이처럼 문체로 조탁해 놓으시니
탁월한 시풍에서 우리네 치열한 삶의 애환들이 다 녹아 엿보이게 합니다.
만남과 어우러짐과 이별, 그리고 사랑“ 내세가 나무그늘에 쉰다.”
이런 커다란 평화로움은 무거운 듯 아래로만 흐르지만
제 가진 것을 다 여타 생명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주고 흐르는
물의 본질적 가벼움일까요? 어떤 초월성마저 느끼게 합니다.
잘 감상하고 갑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 열어가시기 바랍니다. 활연시인님.
활연님의 댓글의 댓글

한밤에 옛날 글을 만지다 문득 지금은 세상에 없는 사람이 생각났지요. 저와는 죽음 선고를 받은 4기에
만난 분이고 그 이전엔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두물머리를, 눈 내리는 설악을, 동해 바다를 같이
여행을 했지요. 실낱 같은 희망을 가졌지만 육개월 남짓 견디다 아픔 없는 세상으로 떠났습니다.
삶은 참 허무하단 생각도 드는데
살아 있다면 재미나게 혹은 보람 있게 숨쉬는 걸 축복이 믿으며 살 일이다 싶습니다.
늘 단단한 문장, 감동의 여울이 내리치는 시
잘 감상하고 있습니다.
편안한 휴일 되십시오. 고맙습니다.
활공님의 댓글

사실 시인님의 시는 저로서는 조금 난해하여
숙지하고 또 숙지하며 깊은 마음을
가슴에 어렵게 안아 봅니다
감사 합니다 시인님
늘 시인님의 시만 훔쳐보고 흔적 한번 남기지
않아서 죄송 합니다
시인님 더운 날씨에 건강 챙기시고
행복한 시간 되십시요
시 잘 감상하고 갑니다
활연님의 댓글의 댓글

쉽고 좋은 그런 시를 쓰면 좋겠는데 아직 미숙해서
늘 아리송한 글만 쓰고 있습니다. 그것은 독자에게
누를 끼치는 일이기도 하겠는데 저의 한계랍니다.
재주가 없는 제 탓이 큰 것이라 송구할 따름입니다.
공중을 맴도는
송골매를 연상하듯
더 넓게 느껴지는 활공님
늘 건강하시고 좋은 일 많으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