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어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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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어귀
책장엔 나무 빗돌처럼 책들이 꽂혀 있다 누런 갈피와 마침표를 포갠 벽이 한 면이다
카페는 방해받지 않을 만큼 아늑하다 커피 한 모금 식도로 흘려보낸다,
입술이 잠시 붉다
빈지 떼어낸 폐허의 빛이 백랍이다 숫돌에서 밀린 지게미는 칼의 눈물인가, 각자의 방향으로 뚝뚝 듣는다
허공에 매달린 검은 종소리 하나,
예리로 베어내고 싶다
웃고 있는 투명한 얼굴, 가늘게 뻗은 손가락, 유쾌한 말소리를 담는 작은 귀, 깊은 눈, 보일 듯 말 듯 실루엣이 드리워져 있다
투명한, 언뜻언뜻 검은 휘장, 아릿한 현기증 같기도 하다
겨울바람이 희룽거린다 저녁은 빠른 속도로 번식해 금세 어둡다 가게들이 하나둘 등을 거는 거리,
벽과 벽이 칼날이다
자신의 장례에 먼저 도착하려고;
오는 방향과 가는 방향이 다른 모서리를 주머니에 욱여넣고 계단을 내려간다
아무도 꺼내놓지 못한 한 꾸러미 투명한 것들;
- 눈자위가 서늘히 붉다
댓글목록
활연님의 댓글

공중에서 사는 사람
이영주
우리는 원하지도 않는 깊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땅으로 내려갈 수가 없네요 보이지 않는 사람들과 싸우는 중입니다 지붕이 없는 골조물 위에서 비가 오면 구름처럼 부어올랐습니다 살냄새, 땀냄새, 피 냄새
가족들은 밑에서 희미하게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 그 덩어리를 핥고 싶어서 우리는 침을 흘립니다
이 악취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공중을 떠도는 망령을 향하여 조금씩 옮겨 갑니다 냄새들이 뼈처럼 단단해집니다
실감에 집중하면서 실패를 가장 실감나게 느끼면서 비가 올 때마다 노래를 불렀습니다 집이란 지붕도 벽도 있어야 할 텐데요 오로지 서로의 안쪽만 들여다보며 처음 느끼는 감촉에 살이 떨립니다 어쩌면
지구란 얇은 판자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심스럽게 내려가지 않으면 실족할 수밖에 없는 구멍 뚫린 곳
우리는 타오르지 않기 위해 노래를 불렀습니다 무너진 골조물에 벽을 세우는 유일한 방법
서서히 올라오는 저녁이 노래 바깥으로 흘러갑니다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며 우리는 냄새처럼 이 공중에서 화석이 될까요
집이란 그런 것이지요 벽이 있고 사라지기 전에 냄새의 이름도 알 수 있는
우리는 울지 않습니다 그저 이마를 문지르고 머리뼈를 기대고 몸에서 몸으로 악취가 흘러가기를 우리는 남겨두고 노래가 내려가 떨고 있는 두 손을 핥아주기를
,
동피랑님의 댓글

부연한 시를 힌트로 삼아 본시를 접근해보았는데 껍질이 단단합니다.
겨울바람이 자꾸 깝죽대는 초저녁 어느 찻집 풍경을 연상하다
괜찮은 여인이 저만치 보이는 것 같기도 한데, 웬걸 독자의 감상
장례가 시작되는 지점부터 한발짝도 못 나가고 주저앉음.
원컨데 공부하는 재미를 위해 자해는 없으시길 바랍니다.
/숫돌에서 밀린 지게미는 칼의 눈물인가/ 감동이 펄펄 끓는
도가니탕입니다.
사전에 열대성 저기압이란 없는 활연님 시의 태풍으로 올여름도
통쾌 상쾌하게 날아가네요. 흐뭇한 요일 버무세요.^^
※ 활연 위에 울연 있다는 건 진짜 우연인가, 가짜 울연인가?
활연님의 댓글의 댓글

여름엔 겨울이 차암 좋지요. 아이스께기~하기에.
이곳에서 활공울연이 일가를 이룰 듯 ㅋ
세상의 곁이란 참 빨리도 스치고 지나간다, 그런 생각도 드네요.
어젠 정화조가 오바이트를 하는 바람에, 급한 마음에 똥물 파도타기를 했지요.
오늘은 가까운 섬에나 나들이 가
파도소리를 듣고 싶네요.
풍경에도 칼이 들어 있다, 그 칼이 아픈 곳을 도려내면 좋겠다, 그런
생각도 듭니다. 시 쓰기 기술도 중요하지만
이건 죽음을 앞둔 어떤 사람에게 따뜻한 말이라도 태워 보내자고
둘러앉은 친구들 모습을 묘사한 것이지요. 저는 엑스트라였지만,
기억엔 선명해요. 손목 긋고 자해하는 재미, 자뻑 등
어제는 요상한 놈이 날 비빕밥 해먹고 종일 쌍욕을 하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는데 세상 참 억하심정도
많다, 그러고 멀뚱히 보다 말았답니다. 안티푸라민도 아니고
안티풍부해^!^
피랑님 물파랑 새파랑...물결무늬로 늘 따스히 스미는 남녘 사나
열풍으로 독자를 서늘히 베소서.
김태운.님의 댓글

오는 방향과 가는 방향이 다른 모서리를 주머니에 욱여넣고 계단을 내려간다 ///
그렇습니다
늘 놓쳐버리는 장면들
소홀한 것 하나하나가 시가 되는 영양소들
감사합니다!
활연님의 댓글의 댓글

모서리는 어려운 한자어로는 망각(芒角)이라 하더군요. 풀자면 까끄라기 뿔인데
우리를 가렵게 하는 걸 돌아서면 다 잊는다, 생각이 듭니다.
세상은 행불을 따질 것 없이 마구 돌 테니 말이지요.
늘, 시여울을 갈라 시느러미를 자르고 시횟감을 켜켜히 쌓아
쟁반 위에 고스란히 놓으시니 그 바다 맛을 제주도 맛을
살뜻히 맛보면 되겠습니다.
늘 신명나는 일 많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