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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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 Rear Window
창 건너편 창
밀교는 낱장으로 펄럭이지
젖꽃판에 말라붙은 꼭지 두개와 최대한 웅크린 오딧빛 자지 아래
최소한 달랑거리는 두 조각 슬픔이 마주쳤지
아저씨도 별이 고프구나, 사층이 오층으로 날아올 동안
우표는 수소문에 붙어 있지
외로운 목젖이 끓고 있는 욕조에
우린 부력 없이 잠시 떠 있지
이창(裏窓)*엔
공전주기를 잃은 세간들이 서성거리지
우리는 무릎을 핥아주던 애완견을 죽이고 목줄은 옷걸이에 걸어두지
목줄과 바지끈이 직교하자 우리가 알던 외면이 타올라
밤하늘 발갛게 물들이지
지붕엔 말뚝을 박고 양을 치는 구름이
흑연을 갈아 뿌리지만
구원은 도착하지 않았지**
집에 갈 때 차고 갈 속엣것들은 목줄에 매달려 자진해서 늘어졌지
구규(九竅) 마를 날 없어
헐거워진 윤간을 윤리하고 목줄을 당겨 사층을 끌어올리면
수증기가 피어올라
풍선을 쓴 구름들
지상을 들어 올리자 공중을 가르마 하는 새들
엎질러진 밥그릇에서 쏟아진 별 부스러기들
깨진 허공의 무릎 아래
괄태충이 기어가지
태를 묶은 길이 흐르고 도열한 못들이 녹슨 잎사귀를 흔들지
손바닥을 뒤집으면 하얘지는 겁간을 질서하지
구멍에다 주먹을 밀어 넣고 얼어 죽은 소년처럼
단호한 허구를 밀랍 하는 꿀벌들이 윙윙거리다 얼어 있지
눈알을 잃은 안와에 사이를 구겨 넣고 자정의
개짐을 풀어 응시하면
실핏줄 터진 천국이 멀건 국을 흘리지
사소한 마비를 닫으면
욕조가 방으로 범람해 둥둥 떠 있는 간(肝)들
울지마, 별을 낳을 거야
* 《이창》은 1954년 제작된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이다.
* * 한용국, 삭망전 "애도는 도착하지 않았다"에서 차, 변용.
댓글목록
활연님의 댓글

별과의 일박
이성목
너를 사랑하는 날은 몸이 아프다
너는 올 수 없고 아픈 몸으로 나는 가지 못한다
사랑하면서 이 밝은 세상에서는 마주 서지 못하고
우리는 왜 캄캄한 어둠속에서만 서로를 인정해야만 했는가
지친 눈빛으로 아득하게 바라보고 있어야 했는가
바라보다가 죽어도 좋겠다고 너를
바라보다가 죽어도 좋겠다고 나는
한 숨도 못 자고 유리 없는 창문을 열었다가
닫았다 우리 이미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
어디선가 별이 울음소리를 내며 흘러갔고
어디선가 꽃이 앓는 소리를 내며 돌아왔다
그건 언제였던가
어깨 위로 비가 내리고 빗방울 가슴치며 너를 부르던 날
그때 끝이 났던가 끝나지 않았던가
울지 말자 사랑이 남아 있는 동안은
누구나 마음이 아프다고
외로운 사람들이 일어나 내 가슴에 등꽃을 켜준다
가난한 사람들이 먼저 일어나 별빛을 꺼준다
이 시는 사랑시 문법으로 보자면, 애틋하고 절절하다. 유행가 가사처럼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 운운으로 읽힌다.
그런데 너를 '어떤 지극한 대상', 나는 그것을 '흠모하는 병자'로 읽으면 사정은 또 다르다. 가령, 너를 '아직 온전하지 못한 세상 또는 불평등한, 도무지 좋아질 바 없는 세상'으로 읽고, 나를 '간절함은 있으나, 가려 하지 않는 병든 우리'로 본다면, 이 시는 아름다운 세계, 더 나은 세상에 대한 열망은 있으나 가지 않은, 갈 수 없는 분절된 길을 의미할 수도 있다.
어떤 각도에서 접하고 이 시를 사랑할 것인가를 물으면, 나는 '아픈 사랑의 노래'로 읽을 것이다. 그것으로도 이 시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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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엘06님의 댓글

응시한다는 것은 사건에 말려든다는 것과 동일어가 아닐지요
즉 바라보는 행위 자체가 세계에 대한 적극적 대응이고 최종적인 행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 시는 세계에 참여하는 방식의 독특함, 그래서 그 구원 방식의 독특함, 이런 것들을 느끼고 생각하게 하네요.
행마다 그 미묘한 언어의 떨림이 참 좋습니다.
저도 히치콕 감독의 영화 '새'를 모티브로 하는 글을 한번 짓고 싶은데, 그 생각을 빨리 옮기고 싶네요.
활연님이 자극을 주셨습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
활연님의 댓글의 댓글

주말 아침 다녀가셨네요. 이 글은 비토로 옮겨서 낱낱이 해부해 바치겠습니다. 자폭인지 공부인지 모르겠으나,
애매한 것들이 많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