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광사 노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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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광사* 노송 / 테울
1.
오늘도 산자락에 기어들어 풀을 뜯고 있다 이리 기웃 저리 기웃 딱히 소일거리 없는 중성기*의 방목이다 기듯 버거운 발목을 옮기는데 근처 드러누운 억새들 틈에서 꿩 두 마리 놀란 듯 푸드득거린다 대낮에 무슨 짓을 했을까 물론 정분을 나눴겠지 중얼거리는 순간 몇 발치 앞 노루 둘 팔짝 팔짝 달음박질이다 저들도 연애 중일까 슬슬 약이 오르는데 기운이 빠진 자리로 언뜻 다가선 노루 같은 몽생이* 눈망울이 말똥이다 병 주고 약 주려는 걸까 어르고 달래는 낌새 몹시 친한 척 둘러보니 모두 넷 엄마 아빠 갓난아기까지 요놈은 아마 누나인 듯 오붓한 정경에 몰골이 화끈거린다 소인 척하는 난 대체 누굴까 부러운 건지 부끄러운 건지 도무지 뭐가 뭔지 묘한 기분으로 식은땀인 듯 더운 비인 듯 아무튼 온몸이 축축해지는 봄날이다
2.
두리번거리다 마침 마주친 곳
산사 뒤뜰 산만한 소나무
그늘로 보아 어림 수백 척 체구
나잇살만큼이겠다
300세가 넘었다는데
마치 산신인 듯
정광하다*
어쩜, 보리수 같다는
생각
오늘의 인연들을 엮어준
청청한 생불生佛이거나
3.
딱히 하릴없는 날
풀 한 줌에
뭃 한 모금 마시며
불씨를 피우던
소일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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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광사: 제주시 해안동에 위치한 절
* 중성기: 제주도에서 거세된 소를 이름
* 몽생이: 제주도 방언, 망아지
* 정광하다: 늙은이가 정신이 맑다
- 라는 뜻의 제주도 사투리
댓글목록
책벌레09님의 댓글

표현의 깊이가 노송 같습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김태운.님의 댓글의 댓글

정나미가 뚝 떨어집니다
솔똥처럼...
노송 같다면 늙은이 같다는 거...
우리 벌레님
다시 봐야겠어요
아무리 늙었다지만
아무튼 즐겁지 못한 하루입니다
힐링님의 댓글

봄날에 벌어지는 자연 속의 한가로움이
정분을 불러오는 기운을 더 돋이고
그들을 바라보는 관점은 하나의 인연이자
봄날에 선사 해주는 그 풍경의 절묘함이
인연이요 생불로 이어지니
이 또한 세상사의 모든 것이 인과관계 속에서
아름다운 조화임을 봅니다.
김태운 시인님!
김태운.님의 댓글의 댓글

한가로움인지 하릴이 없어 그런 건지는 저도 헷갈립니다. ㅎㅎ
아무튼 하루를 그렇게 보냈답니다
감사합니다
김 인수님의 댓글

김태운 시인님 시를 따라서 한참을 산속으로 걸어보았습니다
그 산속의 리얼한 풍경
동물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시속에서 읽습니다
산사 뒤란에 푸른빛깔로 서 있는 소나무를 읽으며 한세상을 다 보았고 굽은 날들을 채록한 소나무
입을 닫고 살았기에 그렇게 300년이나 살았나보네요
문의 오솔길을 즐겁게 걸어보았습니다 김태운 시인 님
김태운.님의 댓글의 댓글

리얼할 수밖에요
지금쯤 한라산자락으로 오르면 꿩은 틀림없이 만나고
노루는 어쩌다 만나고
말은 자주 눈에 띈답니다
저들과 하루를 보냈습니다
고사리 핑계로...
감사합니다
callgogo님의 댓글

저도 강원도 무메산골촌놈이라서 어머니와 고사리꺾으러 다녀봤지요.
김 시인님의 글을 보면서 옛 시골생각이 떠오르는군요.
산사의 풍경과 산자락의 풍치를 잘 느끼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김태운.님의 댓글의 댓글

요즘 제가 꽤 재미를 느낍니다
산에서 노는 재미지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