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보지 않은 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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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보지 않은 곳에 / 안희선
문득,
내가 가보지 않은 곳에 가고 싶었다
미처 수습하지 못했던 삶의 잔해가
휑하니 널브러진 곳에
내가 애써 외면했던 아픈 시간들이
차라리 착한 꿈이 되어,
안개 같은 인간의 숲에서 배회하고 있었다
먼 하늘에서 살며시 내려 온 태양도
대지를 포옹하며, 골고루 구석 구석에
눈물어린 따스한 온기를 나누어 주고 있었다
이곳에서 불안한 건 오직, 나밖에 없었다
언제나 나보다 한 발 앞서 달아나는
내 마음은 여전했다
꿈꾸던 아름다운 삶이 늘 그렇게,
나를 지나쳐 앞서 달려간 것처럼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닌 나
원래 잃을 것도 없건만,
왜 항상 잃고 살아왔다고 느껴졌던지
그렇게 홀현(忽顯)한 구름처럼 걷다 보니,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에서
이윽고 나도 없어지고
저 멀리 보이는 하얀 산 위로
창망(蒼茫)한 허공만 푸르게 빛난다
하늘에 이르는 길이
더 이상, 지상(地上)의 길이 아닌 곳에서
내 앞에 소리 없이 열린다
누군가 오래 전 부터 마음 한 자리 비워둔 곳에
비로소 즐거운 숨을 쉬기 시작하는,
야릇한 영혼 하나가
하늘에서 동아줄을 타고 내려온다
그와 인사를 해야 할지,
망설여진다
하지만, 나는 이곳에서 이미
내가 없어진 것도 모르고
Free as a bird
댓글목록
활연님의 댓글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길러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라고 읊조렸던 엘리엇의 시가 생각납니다.
우리가 사는 곳이 황무지 같기도 하고 사는 게 황무지의 먼지를 껴입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시간이 더 지나 이 시를 읽으면 어떤 실루엣이
쓸쓸하게 느껴질 것 같습니다.
이곳은 비 갠 후의 휴일이 쾌청합니다.
"창만한 허공" 아래에서 지금이 봄날인가, 느껴보아야겠습니다.
좋은 일이 나뭇가지에 맺히는 꽃잎 같이 솟구쳐 오르는 봄이기를 바랍니다.
늘 건강하십시오.
안희선님의 댓글

퇴고차 올려본 글입니다만..
귀한 말씀, 고맙습니다
활연 시인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