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수천안千手千眼 관음觀音이 내게 시집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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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천안 관음이 내게 시집왔네
법명法名/ 덕산德山
법호法號/ 탄무誕无
화두 들고 골을 탔고
화두 들고 김을 맸고
화두에 살고, 화두에 죽다
갔네 갔네
장가갔네
이제까지 지은 농사(업嶪) 다 팔고 장가갔네
팔기는 어데 내다 팔겠는가?
인간 세상(중생계衆生界)에는
돈 안 된다고 살 사람이 없어
온 우주를 거느리고 있는
공에 공으로 내어주고
새색시 관음을 맞이 했네
관음을 색시로 맞이 하는 일
이게 말이 쉽지,
얼마나 엄청난 일인 줄 아는가?
선택받은 자만이 할 수 있는 일
바늘마저 없는
빈털터리 되어야 관세음보살을
내 색시로 맞이 할 수 있다네
관음의 손
관음의 얼굴,
관음의 눈동자,
나와 늘 함께 자며
함께 일어난다
왔네 왔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관음이 내게 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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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탄무誕无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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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탄무誕无는 물을 밟듯 적는다.
부처에게 부처는 없다.
부처는 자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은하銀河나
아주 먼 정토淨土의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부처는 바로 자기 자신에게 있다.
자신의 본래 성품이 정토淨土다.
세상의 모든 존재가 자신의 본래 성품을 차별 없이 평등하게 두루 갖추고 있다.
공에 계합한,
깨친 사람은 칼을 맞아 피를 철철 흘리며
목숨이 경각에 달한 순간에도,
숨이 곧 넘어가는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본래 성품, 부처와 대면한다.
어떠한 상황, 어떠한 조건, 어떠한 장애와 걸림이 있어도 대면이 된다.
부처는 인간의 몸 전 기능을 통해 실재의 흐름에 참여하고 있다.
부처는 모든 일에 종사하고 있으나 주인 행세는 하지 않는다.
이래라저래라,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간여干與하지 않는다.
부처에게는 말없는 침묵과 다 쓸려나가고 아무것도 없는 고요만이 있다.
여기에 거짓과 상상은 존재할 수 없다.
진공眞空만이 실재實在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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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무誕无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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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탄무誕无는 무문관無門關을 설說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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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천안千手千眼/
천수천안을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라 이름 지어 부르지만,
관세음보살은 부처의 다른 이름이다.
부처에게는 이 말고도 수없는 다른 이름이 붙어 있다.
관음觀音은 인간의 본래 성품으로서 관세음보살에서 사용되고 있는
일천천 자는 이름을 지을 당시에는 천 자나, 만 자가 가장 큰 수였다.
이 천 자의 뜻은 헤아릴 수 없음을 뜻한다.
천수천안에서 천 자는
무량대수보다 크고, 청정보다 맑은 수다.
세상 그 어떠한 수보다 크고, 세상 그 어떠한 수보다 작다.
그 수가 바로 부처표 공이다.
청정淸淨은 수를 가리키는 언어다.
허공虛空도 수를 가리키는 언어다.
찰라, 순간 또한 수의 단위이다.
천수천안의 뜻은 시작과 끝이 없는 눈과 손이다.
관음(부처)의 본체本體를 가리키고 있다.
헤아릴 수 없는 손과 눈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관세음보살을 당시의 사용되고 있는 가장 큰 수,
가장 알기 쉬운 일천천 자를 사용하여 천수천안이라는 이름을 지어 갖다 붙였다.
온 우주가 부처의 눈이고, 온 우주가 부처의 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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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무誕无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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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우주를 포섭하고 있는 눈과 손이 인간의 본래 성품 관음(부처)이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다 듣고 있으면서,
형상 없이 말없이 지켜보고 있는 관음(부처)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관음은 인간의 본래 성품이다.
인간의 본래 성품이 관음(부처)이다.
관음(천수천안, 부처)은
침묵과 고요를 먹고 살며 영원불멸永遠不滅로 존재한다.
다른 말 같은 뜻에 속지 않았으면 한다.
부처 따로 있고,
관음 따로 있고,
자신의 본래 성품 따로 있고 이렇지 않다.
자신의 본래 성품이 모든 불보살佛菩薩의 다른 이름이다.
* 알몸/ 빈 몸을 가리키고 있다.
/ 아무것도 없는 텅 빔을 뜻한다.
* 바늘/ 지난 무문관 강의를 할 때
/ 송곳과 바늘은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 자세히 설명해 드렸다.
/ 곁에 두고두고 지나간 글을 깊이 있게 새겨 읽었으면 한다.
* 이제까지 지은 농사/ 물질적인 부동산과 재산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 제도권 안의 그릇된 지식,
/ 잘못된 공부를 가리키고 있다.
* 인간 세상/ 고해의 바다, 고통의 바다, 중생계衆生界다.
/ 인간 세상을 다르게 표현하면 중생 짓 잘하는 세상을 말한다.
/ 곧 죽어도 안 그랬다, 때려죽여도 모른다./로 거짓에 거짓을 더해 참을 만들려 한다.
/ 인간 세상은 거짓과 안 그런 척하며 위선의 탈을 씌고 살아가는 중생계다.
/ 중생 짓 잘하려면 가면이 천 개, 만 개도 모자란 중생이 인간이다.
/ 멀쩡한 선남선녀들을 속이고, 자신도 속인다.
/ 남을 속이려면 자신부터 속여야 한다.
/ 이 죄업이 오음산과 수미산을 뒤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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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무誕无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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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침은 자기 스스로 부처가 되는 것이지,
부처(불상, 십자가, 신앙심)를 타자他者로 경배하는 것이 아니다.
깨친 사람은 모두가 유아독존唯我獨尊이다.
이것은 자랑도 아니고, 교만도 아니고, 아만도 아니다.
체험에 의해 체득된 '당당한 부처의 주장이다.
지식과 사람들 감성에 의지한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
부처표 공만이 나를 볼 수 있는 신증神證의 대상이므로 그렇다.
유아唯我에서
아我(나)는 1인칭 대명사로 개인의 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부처(본래 성품)를 가리키고 있는 1인칭 나다.
유아독존의 뜻은
깨침의 세계, 깨침의 본체에서는
부처(본래 성품)만이 홀로 존재한다.
홀로 존재하나 온 우주를 포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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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무誕无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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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힘없고 드넓은 신령神靈,
손가락 끝에도 부처표 공이 피어 있다.
그대에게 묻겠다.
"글을 읽은 것에 대한 느낌과 감성 따위는 묻지 않겠다."
"글을 읽으면서 나타난 경계는 어떠했는가?"
/붉은 진흙을 덜 익은 홍시에 처바르지 말고 말해 보라.
/지식과 이론, 사람들 감성에 호소하지 말고, 부처표 공으로 대답해보란 말이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다.
몸은 옛 몸이로되 사람이 옛사람이 아니다.
지금 이 자리에 이렇게 존재하는 나는 새로운 나다.
부처로부터 다시 태어난 나다.
부처가 낳은 기린아.
경계에는 성인과 범부가 있고,
경계에는 더러움과 깨끗함이 있다.
경계에는 색色과 상相이 있고,
경계에는 이치와 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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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에는 너와 내가 있고,
경계에는 움직임과 고요함이 있다.
경계에는 가는 것과 오는 것이 있고,
경계에는 아름다움과 추함이 있다.
경계에는 선함과 악함이 있고,
경계에는 사랑함과 미워함이 있다.
경계에는 반드시 원인과 결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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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무誕无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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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경에는 보리菩提라 하였으니 깨침이 체體가 되기 때문이며,
화엄경에는 법계라 하였으니 서로 사무치고 융통하여 포함하기 때문이다.
금강경에는 여래如來라 하였으니 가고 오는 곳이 없기 때문이며,
반야경에는 공이라 하였으니 우주의 모든 만물이 돌아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경에는, 반야경에는 열반이라 하였으니 모든 성인이 돌아가는 곳이기 때문이다.)로 되어 있다.
이 주석은 맞지 않다.
성인만이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래서 바르게 설명드리기 위해 고쳐 바르게 적었다.
반야경은 공空 사상이다.
금광명경金光明經에는 여여如如라 하였으니 진실하여 변함이 없기 때문이며,
정명경淨名經에는 법신이라 하였으니 보신과 화신이 의지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기신론에는 진여眞如라 하였으니 삶과 죽음이 없기 때문이며,
열반경에는 불성이라 하였으니 모든 만물이 갖추고 있는 본체이기 때문이다.
(경에는, 열반경에는 불성이라 하였으니 삼신의 본체이기 때문이다.)로 되어 있다.
이것 또한 바르게 잡는다.
불성은 모든 만물이 본래부터 차별 없이, 평등하게 갖추고 있는 본체이며, 본바탕이다.
진공의 본바탕이 없으면 어떠한 색色도 볼 수 없다. 모양(相)이 나타날 수 없다.
진공이 없다면 유형이든, 무형이든 어떠한 것도 그 자리에 설 수 없다.
원각경에는 총지摠持라 하였으니 공덕을 흘려 보내기 때문이며,
승만경에는 여래장如來藏이라 하였으니 숨겨 덮고 포용하였기 때문이다.
요의경了義經에는 원각圓覺이라 하였으니 어두움을 부수고 홀로 비추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래 성품에 대해
천 가지, 만 가지 이름이 붙은 것은 인연 따라 이름을 지었기 때문이다.
이 말고도 인간의 본래 성품에 대한 이름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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