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3> 나를 위해 적게 쓰고, 남을 위해 크게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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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해 적게 쓰고, 남을 위해 크게 쓴다
법명法名/ 덕산德山
법호法號/ 탄무誕无
부처는 실존적이지만
눈은 표면적,
눈이 뒤집혀도
눈은 눈
눈이 달라지려면
눈에 뭉친 업장業障(마장魔障)이
눈 녹듯 다 녹아야 한다
밖으로 치닫던 눈빛 꺾어
선禪을 통해 체득된 햇빛으로
나의 내부를 비춘다(廻光返照)
나는 부처를 떠나 존재할 수 없다
나는 부처와 불가분이다
나는 부처와 한통속이다
부처가 낳은 기린아麒麟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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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 인간의 본래 성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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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탄무誕无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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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송禪門頌/
눈이 멀어 남두성 일곱이며
귀가 먹어 북두성 여덟이다
안팎으로 자명自明한 공空이
오색 그린 종이 뭉개니,
안방서 탐욕의 어미가 죽고
무명의 아비는 밖에서 죽어
육 형제마저 가난에 죽은
대가 끊긴 향엄상수화香嚴上樹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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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무誕无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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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탄무誕无는 말한다.
우리 인간의 정신적 에너지는 사물과 세계의 정보를 얻고 다음 행동을 결정하는 데 쓴다.
그런데 이 정보라는 것이 대개는 눈, 즉 시각을 통해서 온다.
신경이 곤두서고 피곤할 때 눈을 감고 생각한다.
/내가 너무 많이 보는구나. 쇼펜하우어가 그랬던가.
/눈이 있어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려는 욕망이 눈이라는 기관을 있게 했다./고
깨침은 입체라 평면적 진술, 긍정이나 부정의 진술로는 다 드러낼 수 없다.
긍정이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하다면, 부정 또한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하다.
인간의 본래 성품은 이 양 극단을 벗어난다. 그리고 양극을 다 포섭한다.
그래서 부처(깨침, 본래 성품)는 중도中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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