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을 바르게 모르면 해주고도 죄가 더 커 사후 공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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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바르게 모르면 해주고도 죄가 더 커 사후死後 공덕空德은 없다
사문沙門/ 탄무誕無
내가 말하는 공은
인간의 마음으로 공을 만들어
운전할 수 있는 공이 아니다
마음으로 공을 만들어 그 공을 마음에 부합시켜(적용해)
이랬다저랬다 할 수 있는 그런 싸가지없는 공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공을 그렇게 생각하게 되면
우리 인간 본래 성품 근본(붓다, 선각의 말) 자체를 오해하게 된다(오류를 범하게 된다)
우리 인간 본래 성품(붓다) 본체로 실존하는 공은
유有와 타他를 뺏을 줄 알고,
모든 유타有他를 세울 줄 안다(유공이무유有空而無有, 파사현정破邪顯正)
우리 인간 본래 성품 본체로 현존하는 공은
사리무애 이사무애(事理無碍, 理事無碍)하므로
속俗 이대로가 공이고(明俗卽眞명속진공),
사(事, 색色과 상相, 소리) 이대로가 공의 부림이며,
용用 이대로가 공의 체면體面으로써,
진속(眞俗, 붓다와 속제/ 공과 색, 상)이 다 이제쌍현(二諦雙現)한다
이유以有야 이러해도 있는데 공은 없다(있는데 공이 중생 눈에 안 보인다)
그러나 공유가 분명히 있다
공은 공이고, 유는 유다(개별적으로 보면 색은 색이고, 공은 공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상즉상입이 되기에 사사무애(사리무애와 이사무애를 합친 말)가 성립되고
사사무애 성품(묘용)을 두루 갖추고 있어 상즉상입이 바로 동시 성립된다
공이 유타有他를 쌍망쌍탈雙亡雙奪해도
공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공과 새로 형성된(나타난) 유(有, 타他)가 서로서로 바로 또 상즉상입된다
공이 모든 유타有他에 성립됨(즉卽과 입入이 바로 성립됨= 성립됨과 망탈)이 교철무애交徹無碍해서
일상무이(一相無二 공 하나뿐) 쌍견구리(雙見俱離, 다른 양변이 다 떨어져 나감),
하여 눈에 보이는 색, 귀에 들리는 소리, 눈에 보이지 않는 상이 그대로 설 수 있다
이것이 공에 의해 유가 함민咸泯이 됨과 동시에 공과 유의 쌍존양상雙存兩相,
공과 유타가 전부 한 덩어리다
색을 여의고 공은 없고, 공을 여의고 색이 없다
하지만 공을 여의고는 어떤 색(상, 삶과 죽음)도 바로 설 수 없다
공(붓다의 본체)에 계합한 나, 공을 체득한 나는
공과 유(有, 유=타他)의 명확함을 손바닥 보듯이 본다
그래서 공처럼 모든 차별 견해가 없다
정견(情見, 마음으로 보는 견해)과 변견(한쪽, 세속에 치우친 견해)을 뛰어넘어
물외物外를 소연逍然한다(물외를 걷는다, 물 위를 걷는다, 붓다 품속을 걷는다는 뜻)
세간살이 이사理事가 진공절상眞空絶相이 된 격외도리格外道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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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우리 인간이 잘못 알고 있는 교사(교설)을 바로잡아 드립니다.
자비 하나 드립니다.
붓다는 어디에나 있다는 말은
붓다를 체득한 데서 하는 말이지,
중생의 무명을 그대로 가지고 이 말을 하면 틀립니다.
붓다를 증證한 데서 나온 소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비 두울 드립니다.
중도란 우리 인간 본래 성품의 본체인 공을 가리키는 다른 말입니다.
중도란 말이 나오면 볼 것 없이 바로 우리 인간 본래 성품의 본체인 공으로 이해하십시오.(오직 공만이 찐 중도입니다.)
도道란 우리 인간 본래 성품의 다른 말 같은 뜻 붓다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도道는 = 우리 인간 본래 성품/ 붓다를 가리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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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 세엣 드립니다.
종범, 법정, 한용운은 깨친 선각이 아닙니다.
이외에도 제 입으로 다 거론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있습니다.
법정은 훗날 눈 밝은 사람(저와 같은 선각)의 눈이 두려웠는지??,
가기 전에 미리 자신이 솔직하게 "나는 깨치지 않았다"고 말하고 갔습니다.
붓다를 바르게 모르면서 중생의 감성에 가까운(법문으로 중생의 감성을 어그로 끈) 이들의 글을 퍼다 나르면
붓다에 대해 공부하고 있는 참공부인과 남을 방해하는 큰 죄가(해코지하는 짓) 됩니다.
또한 선각(붓다)의 말을 가로막는 대역죄입니다.
중생의 무명 업식 끊지 못하고,
무명의 업식 그대로를 가지고 받아들여 퍼다 나르면
죽으면 붓다에게 오라를 받게 될 반역(역적, 죄업)입니다.
법문으로 감성을 더 더 자극해 달라고(더 더 자극받고 싶어) 열광하는 중생(무명)들의 팬덤이
이들(종범, 법정, 한용운)에게 형성되어 있을 뿐,
이들이 한 말은 법문을 난발한 감성팔이지, 깨침이 아닙니다.
그들은 깨친 선각이 아닙니다.
퍼다 나르지 마십시오. 사후 아무 보상도 받지 못할 것에 공연히 애쓰지 마십시오.
가만히 그냥 편히 쉬는 것만 못합니다.
사후 어떤 효능도 없습니다.
그 죄업이 수미산을 넘습니다.
중생은 붓다(선각, 선사)를 식별할 줄 아는 눈이 없습니다.
중생은 붓다와 계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퍼다 나르려면
어느 집단(종宗,=종파, 어떤 집단 이기주의)에도 일체 편향됨 없이
붓다와 오롯이 함께하는(붓다와 계합해 오롯이 붓다를 바르게 설하는) 확철대오한 제 글을 퍼다 나르십시오.
그게 사후를 위한 도(道, 바른길)고, 수승한 공덕이 됩니다.
알고 짓는 세간살이 죄보다 붓다를 바르게 모르고 짓는 죄가 너무나 크고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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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인연은 붓다가 시작을 알 수 없는 날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그 끝이 없는 날까지
어느 때, 어느 시절, 어느 장애, 어느 경계, 어느 걸림, 어느 장소, 어디에나 두루 편재해 있기 때문에
시절인연이라고 합니다. (시절인연은 = 붓다와 만남, 붓다와 계합입니다.)
깨치지 못한 자가 깨친 선각의 언어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바르게 알려면 자신도 깨쳐야 합니다.(깨침의 언어를 바르게 알려면 붓다와 계합해야 합니다.)
선각의 말을 그대로 따라 해 보려고 하십시오.
득도자원得道者援 제천여의생(諸天與依生, 하늘이 의지할 생=몸을 줌)입니다.
믿고 안 믿고는 인간의 문제지, 붓다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비慈悲로 많은 것을 친절히 바르게 가르쳐드렸습니다.
쉽게 얻으니 귀한 줄 모르면 절대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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