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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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여름날
햇살이 공중으로 날갯짓 파닥거리자 금빛 부스러기 날리는 천공의 사다리를 타고 날아오르는 잿빛 나비들
안개 걷힌 풀숲에 *치히로가 들꽃처럼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별똥별처럼 꼬리 잘린 길 잃은 그날 밤
고개 숙인 악몽이 꼬리를 빙빙 꼬며 설녀처럼 공중으로 휘날렸다
나는 미지의 힘에 이끌려 숲 속으로 점점 더 깊이 곡괭이처럼 파고 들어갔다 그 순간,
환한 황금빛이 산란하며 눈동자를 파먹듯 파고들었고 동화책에서 읽었던 꼬르륵거리며 섬처럼 떠올랐던 일러스트의 한 장면,
환상의 城에 도착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듯한 성문,
환영 인사처럼 배롱나무 붉게 멍울 터뜨린 꽃잎처럼 활짝 열려있었고 바늘귀처럼
좁은 문 안으로 몸을 구겨 넣자 인기척은 호수처럼 잔잔했다
태초의 바다처럼 발끝으로 고요가 몰려왔고 돌아갈 수 없는 희미한 날들이 동풍에 나부끼고 있었다
내 심중에 파문이 일렁이는 오래된 사진 한 장을 꺼내자 내가 태어나기 전 아버지가 할아버지 옆에 보초 서듯 앉아 있었다
그날 이후 아버지는 내 얼굴이 되었고 나는 아버지의 얼굴이 되었다
파도가 긴 꼬리원숭이처럼 파고의 꼭짓점을 건너가는 날
벼랑 끝에 서면 저 멀리 둥글게 번지는 옥빛 마을이 있다 수평선에 두 다리를 나란히 뻗고 치히로가 우산을 들고 앉아 있었다
빗속에는
빗발치는 비구름을 몰고 온 잿빛 나비의 이야기가 쏟아지고 어느새 나는
우산 속에 갇힌 동화 속 주인공이 되어 일몰의 해안가 노도처럼 부서지고 있었다
바다가 포말처럼 온몸을 뒤집으며 허옇게 울부짖고 있었다
날개 없는 나비 떼가 해안선을 날아오르고 있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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