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는 개별적으로 되어 있지 아니한데도 불구하고 말이야 * * * 나는 붓다의 용사로써 현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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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는 개별적으로 되어 있지 아니한데도 불구하고 말이야
사문沙門/ 탄무誕無
문자와 정보는 어제의 예비군,
현역이 아니다
현역에 대한 얘기는 현역에게 들어야 한다
용사用辭는 현역으로 있는 붓다 오직 하나뿐
붓다는 축구적逐句的 얘기가 아니다
현존하고 실존하는 계합의 영역, 체험의 영역,
문자는 제도권을 성립시키기 위한 조직(정보)이지
실체가 있는 실제는 아니다(실체는 그렇지 않다)
사전적 의미가 최종 정보가 될 수 없다
비유非有 비무非無로써 아설즉시공我說卽是空(비유가 무고, 비무가 공이다)
선각의 언어는 깨침의 언어이므로
깨치지 못한 자의 번역은 한참 잘못된 번역(오류),
의식분별 객진번뇌 여전무수如前無殊한 걸 가지고 견성(도력道力)이라 하면 틀리다
언어적 조합(편집 기술)으로 성립시킨 잘못된 번역은
객진번뇌가 빼어날 뿐 견성(도력)이 아니다
사람들은 중생 노릇 잘하는 걸 가지고
사람 노릇 잘하는 걸로 알고 있다
그건 제도권 함정(속임수)에 빠진 자가당착,
이실직고 중생 놀음
서로서로 부증불감 청정무구한데도
너와 내가 만남을 갖지 못하는 것은
나의 도력이 얕아서 그런 게 아니라
너의 신심과 도력이 없어 그런 거다
한다리 건너 이렇게밖에 볼 수 없다
너가 구경! 구경이 아니어서 그렇다
*
구경究竟/
궁극의 경지로써 붓다의 경지를 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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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붓다의 용사用辭로써 현역이다
사문沙門/ 탄무誕無
인간의 마음은 마계魔界여서
붓다를 깨치는 데 있어서는 요각심了却心,
아애집장我愛執藏하게 한다
인간의 마음은 능변能變에 능해
이걸 변이變異해 수거한다
인간의 마음(심의식)은 잡염雜染의 종자,
과果가 날 때, 인因이 성립하는 데에는
마음 변이가 있었다
인간의 진아眞我는 집執하지 않는데
인간의 식識(심의식)이 집한다
붓다와 계합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은
파헤치고 분별하고 구분 짓는 인간의 마음(심의식)
피상적 관찰에 의해
눈으로 보는 것 때문에 공간이란 말이 만들어졌고,
눈에 보이는 변화 때문에 시간이란 말이 만들어졌다
본래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다
시절인연이란
때가 되어 남녀가 만나는 인연이 시절인연인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있는 붓다와의 만남이 시절인연,
시절인연= 붓다와의 인연, 붓다와의 계합을 가리키는 말이다
중생(남)과 중생이(여가) 만나는 게 시절인연이 아니다
시절인연 불급중생不及衆生(중생은 시절인연에 미칠 수 없다),
중생은 무명부고無明覆故 하이고何以故
이시연고以是緣故(이러한 것, 이러한 뜻)로
보려해도 시절인연(붓다)을 보지 못한다(시절인연을 만날 수 없다)
붓다는 최고의 인문학,
위대한 인성학, 위없는 상상지上上智,
영원불멸 실시간 생방 자연 다큐
*
오늘도
우리 인간이 잘못 알고 있는 잘못된 교설(교사)을 바로잡아 드립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에서/
수처작주 입처개진이란
어느 곳에 가든 주인이 되라, 그러면 그 자리가 모두 참되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게 사전적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되었습니다.
깨치지 않고 이렇게 하게 되면 중생은 어느 곳에 가든 어느 곳에 있든
이 말을 믿고 착각으로 착각을 불러들여 착각에 빠져 더 심한 중생 짓을 하게 됩니다.
隨處作主 立處皆眞에서
주主는 붓다를 가리키는 대명사입니다. (주는 붓다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진眞도 붓다를 가리키는 대명사입니다. (진도 붓다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도달해야 할 궁극이고, 이것을 실현해야 하는 게 인간의 참삶입니다.
어느 곳에 가든 붓다는 주인공으로 있고, 어느 곳에 있든 붓다는 참 진리로 있습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의 바른 뜻은 어는 곳에 가든, 어느 곳에 있든
붓다가 늘 주인공(참진리)으로 있으니 붓다를 깨쳐라!(발견하라, 체득하라,계합하라)는 뜻입니다.
바르게 아셔야 마음 행위도 바르게 할 수 있고,
행동도 바르게 할 수 있습니다.
바르게 가르쳐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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