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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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책
비가 내려도, 그 비가 은사시나무의 영토를 훑어버릴 때에도 내 윗옷 호주머니엔 언제나 작은 책이 들어 있었다. 골목길 돌아 옛집 찾아가던 오랜 세월 내 가난한 뒷모습 비춰주던, 던져지고 구겨졌던 이 책을 바라본다. 문득 생각난다. 인생은, 도서관에서 빌린 책처럼 잠시 빌린 거라고 도서관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며 생각하던 신록의 내가. 책을 훔쳐서라도 세계를 읽으려던 어느 이국 소녀의 푸른 눈과 피 튀는 전쟁터에서 책을 가슴에 껴안은 채 죽어가던 푸릇한 이국 청년들의, 옹이처럼 책에 박인 그 눈망울이 생각난다. 오래전 내 머릿속 흐린 구정물 퍼내어 버리곤 말간 마중물 퍼붓던 말씀이, 내 마음밭 들가시 무더기 갈아엎고 감람나무로 빼곡히 채우던, 젊은 날의 푸르렀던 밤낮을 생각한다. 이토록 늦은 밤 나는 다시, 낡고 해져 모서리가 찢겨나간 책을 어루만지고 있다. 그리고, 마음은 고마움으로 단단하게 함이 아름다운 거라던 아버지의 말씀을, 하루의 일을 마치고 물 들어찬 봄날의 논을 바라보며 되새기던, 오래 가난하였으나 한번도 가난한 적 없었던 눈물겨운 나를, 책처럼 낡은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댓글목록
콩트님의 댓글

가난뱅이의 슬픔
술이 술을 마시듯
슬픔이 슬픔을 들이켜고
삼동을 건너 집으로 가는 길
수북하게 쌓인 가난을 한 되박 마시고
사지가 비틀거리는 골목길
풀린 언 강물처럼 어둠이 쏟아지는데
저멀리 낯선 아이 하나
가로등 불빛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데
나는 난전을 기웃거리는 날파리
카바이드 불빛이 이리저리 조바심을 내는데
사철 집마당 바지랑대에 앉아 있던 고추잠자리처럼
꾸덕꾸덕 말라가던 가오리처럼
내 등 뒤에서 목덜미를 붙잡고 마름모로 춤추던
까치밥으로 남아있는 그리움 하나
어둠을 갈아 마시며 고개 숙인 목뼈의 등고선이 가파르다
내 망막 속으로 난폭하게 달려오는 전조등 불빛들
노도처럼 부서지는 야로를 마시며
어둠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삼동을 건너 집으로 가는 길
이 모든 것을 등뼈처럼 허물어야 한다는 것을
슬픔이 슬픔을 들이켜던 그날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몰라
*사람 사는것이, 어쩌면..............
옹이처럼 박힌 거룩한 상처는 공감입니다. 너의 눈물이 나의 위안이기도 하고요,
또다른 표현을 하자면
희망이라는 단어의 동의어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시, 잘 감상했습니다.
너덜길님의 댓글의 댓글

말씀, 감사합니다.
길게 써 주신 마음,
고마웁게 헤아리겠습니다.
늘 평안과 건강하심이
함께 하시길 빕니다.
또 지체와 같은 시들
잘 빚으시구요.
나무님의 댓글

시인님의 맑음이 책과 아버님으로부터 시작됐나 봅니다
고마움을 통해 마음이 단단해 진다는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아버지를 가진
시인님이 부럽습니다
너덜길님의 댓글의 댓글

말씀, 고맙습니다.
요즘 시마을을 생기 있게
만드는 분들 중 한 분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늘 진심, 기대 가득한 나날들 되길
바래봅니다.
평안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