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동 헌책방 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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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동 헌책방 골목
갈매기의 꿈.
어린왕자의 꿈.
그리고 나의 푸른 꿈.
무수한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이 날아들던 골목.
그 곳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테처럼 생각에 잠긴
얼굴이 핼쑥한 헌책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어.
달이 해를 배웅하던 어스름 낀 골목에 서서
눈이 내리면 눈을 툭, 털고
비가 내리면 젖은 옷자락을 쓰윽 문지르며
어린왕자처럼, 무화과나무 밑 나다나엘처럼
책들의 숲으로 천천히 걸어들어갔어.
걷는 내게
책들이 추파의 눈짓을 던지면
추파에 못 이겨 기꺼이 유혹당해주던
가을날의 단풍 같은 마음이
물관 체관처럼 오르내리던 골목.
낡을수록 좋은 건 사랑이라 썼던
옛 시인의 눈동자 닮은 가로등이
마당, 삼중당 문고 표지의 말간 명화처럼
고색창연하던 골목.
그렇게 책들의 푸르른 고유명사였던
보수동 헌책방 골목을 헤매이던
별이 쏟아지는 밤들이 있었지.
윤동주, 백석의 희귀본 한 권씩을 어렵사리 구해 손에 든 날
호박죽 한 그릇 먹고 싶어
자갈치시장 들러 두 손 비비며 후후 불던 그 날처럼,
모든 저물어가던 꿈들을 밀어올리듯
속이 뜻뜻해져 올 때면,
나는 오랜 친구 46번 버스를 타고
날 기다리는 세상의 끝 골목 보수동으로 간다.
댓글목록
수퍼스톰님의 댓글

시인님께서 걸으셨던
책방으로 이어진 고풍스런 골목을 상상해 봅니다.
저도 엣날에 공부할 때 원서를 찾느라 동대문 평화시장 근처
청계천에 즐비하게 들어섰던 헌책방을 무척 많이 이용했는데
요즘은 몇 군데 안 남은 거 같습니다.
시인님도 오래전 부터 시를 쓰셨군요.
늘 건필하세요.
너덜길님의 댓글의 댓글

낡을수록 좋은 것은 사랑이라고
김수영 시인이 썼지만,
제겐 낡을수록 좋은 건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에서 나는 나무 냄새도 그렇고요.
늘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이장희님의 댓글

책들의 숲으로 천천히 걸어들어 간다는 표현 참 좋네요.
학창시절 청계천 헌책방가서 이것 저것 보았던 일이 생각나네요.
문제집 팔아서 용돈 쓰던 그때 ㅎㅎ
좋은 추억 떠올리게 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늘 건필하소서, 너덜길 시인님.
너덜길님의 댓글의 댓글

늘 시마을의 든든한 지킴이로.
버팀목이 되어주신 것
늘 감사드립니다.
평안한 시심으로 건강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