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린(水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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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코렐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4건 조회 390회 작성일 20-12-03 21:39본문
수린(水鱗)
1.
수린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최승자(崔勝子)라고 부르기도 하고 에드나 밀레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나는 어제 지리산에 올라 어느 여류시인이 추락사했다는 곳에 갔더랬습니다. 산비둘기 혼자 쓸쓸한 축배를 들고 있었습니다. 고사목은 언제 몸을 일으킬까요? 추락의 궤적은 혼자 뜨겁습니다. 나는 아직도 풀이 자라지 못하는 허공의 어느 지점에 술 대신 내 피를 부어주고 왔습니다.
2.
나는 투명한 유리창 곁에 앉아 있었습니다.
겨울바람이 유리에 슬쩍 몸을 부딪쳤다가 멀리 떠나갑니다.
내 바로 앞에 죽은 새까만 매화나무가 시체의 의지를 굳건히 천장으로 뻗고 있었습니다. 매화가지 끝에 선홍빛 종이 매화들이 탐스럽게 벌어 있었습니다.
주렴이 딸그랑거리는 소리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저 종이 매화들을 되살릴 그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3.
삶이란 죽음의 뒤편입니다. 다른 문을 열고 나가면,
저 찢어지지도 빛바래지도 않는 종이 매화들을
어떻게 죽일 수 있다는 말인가요?
우수수 바람에 모두 쏟아지도록
저들을 채찍질할 수 있을까요?
누가 내 가슴 속에 찢어지기 쉬운
종이 심장을 접어 넣었을까요?
유리창의 혈관을 모조리 잘라놓은
황홀이 폭죽처럼 터지는 그 자리에서
나 혼자 견뎌내며,
수린(水鱗),
그것은 양막을 찢고 간절한 이름부터
흰 천으로 덮인 얼굴부터
투명한 유리창에
그 잔해가 불타고 있는......
댓글목록
너덜길님의 댓글
너덜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깊은 물속 혹은 울창한 숲속에 빠져든 느낌의 시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시구들을 따라가는 내 눈길이 아련해지는군요.
정말 잘 읽었습니다.
코렐리님의 댓글의 댓글
코렐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제 시를 정확하게 앍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날건달님의 댓글
날건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좋은 시, 잘 감상하였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 한 수 올려봅니다.
폐(廢)타이어 (김종현)
아파트 공터 한 귀퉁이
속도를 잊은 폐타이어
땅속에 반쯤 묻힌 깊은 침묵 속
햇빛을 둥글게 가두어 놓고
동그랗게 누워 있다
그가 그냥 바퀴였을 때는 단지
속도를 섬기는 한 마리 검은 노예일 뿐이었다
날마다 속도에 사육되고
길들어 갔다
다른 속도가 그를 앞질러 갈 때
그는 바르르 떨며
가속 결의를 다져야 했다
자주 바뀌는 공중의 표정 앞에서는
잽싸게 꼬리를 사려야 했다
검고 딱딱한 세계 위에서 세월을 소모하며
제한된 영역만 누려야 했다
지금 저 동그라미는 자신의 일생이
얼마나 속도에 짓눌려 왔는지 기억하고 있을까
튕겨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쯤은 했으리라
예약된 모든 속도들 다 빠져나가고
속도는 한 줌 모래처럼 눈부신 한계였을 뿐
얼마나 어지러웠을까
속도에서 벗어나기 위해 속도에 매달린 세월
그가 속도의 덫에서 풀려나던 날
온몸이 닳도록 달려온 일생을 위로하듯
바람은 그의 몸을 부드럽게 핥아주었다
잠시 뒤의 어떤 바람은 풀씨랑 꽃씨를
데리고 와서 놀아주었다
벌레들의 따뜻한 집이 되었다
잃어버린 속도의 기억 한가운데
초록의 꿈들이 자란다
노란 달맞이꽃은 왕관처럼 환히 피어 있다
코렐리님의 댓글의 댓글
코렐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이 시는 전에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제게는 별로 와닿지 않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