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認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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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認識)에게
안녕, 내 오랜 친구,
잘 지냈니.
칫솔질하듯,
뜨개질하듯,
솔방울까듯,
계란을깨듯,
실밥을꿰듯,
그 시절엔
책상에 앉기만 하면 너를 써재꼈지.
안개 자욱한 전혜린을 펼치면서
영원히 성장만을 할 것 같았던 헤르만 헤세를 읽으면서
흔들리며 길 가던 파스칼을 넘기면서
파리의 소년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커피처럼 마시면서
그리고, 그리고 아무말도 없었다를 덮으면서.
국어 선생님이 빨강과 초록의 자필로 도배한 국어책을 들고선
고전과 현대를 통달한 듯 문학을 내뱉을 때도,
그의 교과서가 수년 동안 한 번도 바뀐 적 없는
깨알 같은 주석들을 지렁이처럼 달고 있을 때도.
의심이 생기면 너를 수백 번은 고쳐 썼다.
너를 적다보면 언젠가 너에게 도달할 거라 믿으면서.
축소지향의 일본인이든 확대지향의 중국인이든 뭔 상관이람,
나는 나여야만 한다고, 세계적이란 말은 개밥으로나 주라고.
그러므로 인식지향의 삶.
해부학교실처럼, 어둔 실습실의 그들처럼 나는,
글들을 만지고 째고 뜯고 꿰맸지.
그럴 때마다 찬란히 날아다녔던 피,
피 없인 혁명도 없다며 매일 혁명을 해대던 책들 속에서
너는 언제나 소실점처럼 멀기만 했어.
그러다 깊디깊은 밤 내 사랑을 만났지.
파리의 공원보다 아름다운 시(詩) 속에서.
시(詩)는 내게 말했어.
땅 위엔 사람이,
사람 위엔 법이,
그리고 법 위엔 사랑이 우산처럼 살고 있다고.
그러니
우리 더욱 잘 지내길 바라.
내일도 어제처럼 비가 쏟아질 터이니.
댓글목록
미상님의 댓글

멋진 시입니다
고맙습니다^^
너덜길님의 댓글의 댓글

추운 계절입니다.
건강하시고 늘 좋은 날만 있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