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오는 저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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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순례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4건 조회 534회 작성일 21-01-14 05:13본문
함박눈은 아니고
탐스럽지 않게 어수선하게,
모래알 같은 잿빛 어둠의 가루들이
그래도 겨울답게 소낙비가 아니고 눈이
대량으로 펑펑 쏟아진다
나의 귀가歸家를 멈추게 하여
가족과 나를 시간의 안과 밖으로 갈라놓고
쓸쓸함이 떼를 지어 덤벼든다
꽃사슴 한 마리 중앙공원을 횡단하여 사라진다
온갖 애증과 격정의 종말終末을 선언하는 듯
엄숙하게 차갑게 이 도시를 개간하여
밤의 씨앗을 뿌리고 있다
마주 보이는 전면前面마다 막아서는
감옥의 두터운 장벽들을
용기 하나로 뚫고 갈 수는 없다
더 이상 어떤 목소리도 들리지 않고
윙윙 돌아가는 톱니바퀴의 불협화음 뿐
봄을 준비하는 새싹들의 눈빛도 멀기만 하다
아, 눈이 온다, 눈이 온다, 아다모가 노래를 하듯이
길 가던 사람들이 지붕 없는 독방에 갇혀
나비가 되는 꿈을 잃어버린다
집단적으로 고독하게
눈은 이제 사람들의 마을을 완전히 점령해 놓고
자기들끼리 울적하고 허전해 한다
결국은 그들도 벌판의 수용소에 감금된다
그 캄캄한 심연 경비초소에
탈출자를 위한 작은 등잔불 하나 켜져 있다
댓글목록
창가에핀석류꽃님의 댓글
창가에핀석류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퇴근길에 잠시 걸음 멈춘 군중 속의 고독을 보는 느낌입니다.
아름다운 정서, 잠시 느끼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건안 건필 하시길요~^^
순례자님의 댓글의 댓글
순례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오래 전에 은퇴한 노인이어서 퇴근길은 없습니다.
산책을 겸한 사소한 용무의 외출이었는데
귀로에 눈울 만나 로버트 프로스트를 생각하며 우산 없이 서 있었습니다.
'이 숲의 주인이 누구인지 나는 알 것 같다.' 이렇게 시작하는 그의 시 아시지요?
창가에핀석류꽃님의 댓글
창가에핀석류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그러시군요. 젊은 감각으로 느꼈습니다.
참 서정적이시군요.
결구를, 나는 아직 잠들기 전 가야 할 길이 있다로 기억합니다만.
순례자님의 댓글의 댓글
순례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네, 그 시 맞습니다.
눈 내리는 숲의 아름다움이 나를 유혹해도
한없이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고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나는 숲을 떠나야 한다는,
현실의 무게가 발걸음을 재촉하는
그 숙연한 문장을 반복하며 시가 끝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