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뜩 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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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은미늘barb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2건 조회 421회 작성일 21-05-06 09:17본문
잔뜩 숨긴다.
내가 쳐다볼 때마다 그는 나를 잔뜩 숨긴다.
그는 몸을 길게 늘여 나를 물끄러미 보곤 한다.
그는 늘 바람이 없는 곳에 서 있다.
나는 늘 그를 지나온 바람 한가운데 서 있다.
그는 까맣게 말라버린 가슴의 흔적들을 더듬어
그것들을 들고 서서 지나간 바람을 사랑하곤 한다.
그도 나도 그저 바람처럼 용감하지 못했고
소용없이 울지도 못했다.
바람이 지나가면 그가 그런 것처럼 나도 지나간
바람을 사랑한다.
나는 잘려나간 삶을 들어 그를 본다.
그는 남은 삶을 들고 나를 쳐다본다.
내가 그를 보고 웃자 그는 나를 잔뜩 숨긴다.
나도 나를 잔뜩 숨긴다.
나는 언제나 그를 끌고 다니며 나를 보인다.
그도 언제나 나를 따라다니며 그를 보인다.
내가 그늘에 숨으면 그는 잔뜩 죽는다.
그늘에서 나와 그가 다시 눈을 뜨면 그는 언제나
나보다 시커멓게 큰 삶을 들고 달콤하게 까맣다.
나는 그에게 진절머리 나는 아픔이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나를 잔뜩 숨긴다.
비오는 날이면 그는 물끄러미 암초가 된다.
나는 우산으로 그를 잔뜩 숨긴다.
그는 *이어도처럼 잔뜩 솟아오른 섬으로 나를 보인다.
나는 바다처럼 그를 잔뜩 숨겼다.
우리는 한번도 잃어본 적이 없다.
*마라도 남서쪽 수중 암초,
제주도 사람들의 전설의 섬,환상의 섬,피안의 섬
댓글목록
창가에핀석류꽃님의 댓글
창가에핀석류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작은미늘 시인님! 참 재미있게 읽어 내렸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표현의 신선함이 매력적이라
감칠맛이 좋습니다.
오랜만에 뵙네요. 잘 지내시죠?
작은미늘barb님의 댓글
작은미늘barb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창가에핀석류꽃 시인님! 오랫만에 뵙습니다.
두어달 전부터 습작을 조금씩 시작했는데 아직 부족하고 서툰 시어들만 싱거운것 같습니다.
시인님처럼 깊고 그윽한 숙성의 시어들은 멀기만 합니다.
열심히 하다보면 더 풍성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요즘은 사물들을 한참 들여다 보면서
그것들의 삶들을 맑게 들여다 보고 예전에 미처
보지 못했던것들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늘 무심히 지나치던 것들의 하찮은 기척들에
가만히 멈추어 봅니다.
그리고 시인님의 시를 꺼내보곤 합니다.
자주 찾아뵙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